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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채소가게


BY 박 소영 2007-03-05

단골 채소가게


버스정류장 옆에 자리한 채소장사 할머니, 이곳에 이사 와서 네 번째로 맞는 나의 단골 가게다.

지금쯤은 집에서 쉴 연세이건만 이 혹한에 쪼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파와 버섯과 호박을 달라는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일어선 자리에는 놀랍게도 L P G 통을 갖다놓고는 불을 아주 낮게 켜두고 그 위에 나무곽을 얹어놓고 앉아 있었다. 잘못하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위험하다는 나의 걱정스러운 말에 할머니는 L P G 가스에 대한 위험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이것도 없으면 이 추운 겨울에 장사도 못한다면서 가스불 위험보다는 날씨가 추워 며칠동안 손님의 발길이 뜸한 것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다.

대단지 아파트라 단지 안에 슈퍼가 있지만 나는 채소만큼은 상가주변 거리에 앉아서 파는 좌판장사에게 20년째 산다. 깔끔하게 진열해 놓은 대형마트보다 덤으로 주는 인심과 땅심을 맡으면서 다듬으면 적지만 나의 수고 값도 계산이 되고 채소밭에서 뽑아와 흙을 툭툭 털고 다듬던 고향집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기에 좋다.

지금은 떠나버린 단골가게 주인들, 생생한 기억과 가슴 따스한 아름다운 사랑을 안겨주고 떠나간 그분들을 그려본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신호등 아래서 채소를 팔던 할머니, 저녁 시간이면 제법 사람들이 모인다. 한 평쯤 되는 길 위를 차지해 플라스틱 소쿠리에 올망졸망 담긴 채소들의 밑천이 얼마인지 다 팔면 얼마나 남을까 답이 금방 나올 만큼 할머니 가게는 빈약했다. 퇴근길에 오천 원을 주고 물건을 샀는데 칠천 원을 내어준다. 몇 번이나 이렇게 계산하셨을까? 그 후 나한테는 소쿠리에 담긴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애쓰신다. 정직에 대한 대가를 오래도록 챙겨주시기에 도로 내어놓고 오기도 했다. 굵은 손마디에 까만 얼굴 구부정한 허리를 한 노인은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그립다.

두 번째 과일과 함께 아파트 담벼락에 트럭을 세워두고 장사를 하던 중년부부,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트럭 가게다. 슈퍼서 파는 과일보다 달라는 대로 주고사도 슈퍼보다는  훨씬 값이사서 단골가게로 이용했다.

어느 날, 밤 늦은시간, 인터폰이 울린다. 경비아저씨가 담벼락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나를 찾는단다.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았으면 또 돈을 다 주고 왔는데 이상하게 여겨 경비실에 내려가니 아주머니가 철 늦은 커다란 수박을 한통을 안겨준다. 웬 수박을? 그 자리서 드리면 받지 않으실 분이라는 걸 알고 밤이 늦었지만 장사를 마치고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한다. “아주머니 그동안 감사했어요. 한 번도 물건을 깎지 않으시기에 알아서 성의껏 해드렸지만 마음으로 너무 감사했습니다.”작은 성의지만 받아달라고 하였다. 내일이면 동구 쪽으로 이사를 가기에 찾아왔다고 했다. 아름다운 정을 한 아름 안겨주고 간 10년 전 그 부부가 그립다.

세 번째 생긴 단골가게, 소주를 유난히 즐기시는 50대 후반의 아저씨다. 지금 할머니가 장사하시는 곳에 전임자시다. 아저씨는 담 턱에 항상 소주병에 종이컵이 덮여져 있다. 뙤약볕과 칼바람을 이기기 위해 일정량의 술을 마시던 아저씨, 볕과 술을 마신 검불그레한 모습으로 일을 시작하고 마친다. 인심이 후하고 물건도 많아 손님이 끓는다. 간간이 나타나는 부인은 단골이 익지 않아 턱없이 비싸게 팔면서 술 먹는 남편을 나무란다. 아저씨의 박리다매 주장과 아주머니의 제값 챙기기 상술에 아주머니가 밀려났다. 아주머니가 보이는 날은 아저씨가 아주머니 몰래 비닐주머니에 한 가지씩을 슬쩍 넣어주기도 했다. 도로 내어 놓으면서 한마디 했다. “아주머니 슈퍼와  같은 값이면 절대로 단골들이 여기 오지 않아요. 한 푼이라도 헐한 재미로 여기에 옵니다.”아주머니한테 한 얘긴데 아저씨가 알았다는 눈치로 눈을 껌뻑 하셨다.

어느 날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가 오더니 물건을 나무라면서 시비를 건다. 몇몇이 물건을 고르고 있는 중인데 혼자만 아저씨께 따진다. 그래도 한마디 말대답도 안 하는 아저씨가 안쓰러웠다.“아저씨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왜 당하고만 있나요.”물건 사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하자 그때야 저만치 걸어가 뒤통수도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향해 호기를 부린다. “야, 이놈아 이래 뵈도 내가 하루에 얼마를 버는 줄을 알아, 내 식구 잘 거둬고 살고있어” 그렇게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푸시던 아저씨다. 며칠 동안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께 물었다.“아저씨가 편찮으신가  왜 보이지를 않아요.”라고 했더니 상가 마당에 주차하던 젊은이가 후진을 잘못해 담 아래 장사하던 아저씨를 덮쳐 즉사했다고 했다. 장사 돈은 개도 안 먹는다면서 삶의 고단함을 술로 달래시던 마음 좋은 아저씨는 소주병과 함께 다시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인연으로 끝나버렸다.

대형마트에서 바코드로 물건값을 계산해서 10원이 모자라도 물건을 내려놓고 와야 한다. 기계와 공존하면서 우리는 인간관계를 잃고 산다. 잘 다듬어져 보기 좋게 진열대서 손님을 기다리는 물건은 그날로 식탁에 오른 음식일 뿐 기억에 남는 추억이 없다. 20년째 한동네서 살면서 나의 게 추억을 안겨줬던 길거리 채소장사들, 삶의 무게만큼이나 인정도 두텁고 사연도 각가지다.

지금 이 할머니는 나에게 무슨 좋은 추억을 안겨주고 헤어질까? 누가 먼저 떠날지 모르지만 오늘같이 손님이 없는 날엔 할머니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와 할머니의 한평생 힘들었던 삶의 이야기도 들어본다. 만만찮은 세상살이, 칠십이 넘은 할머니는 허술한 난방장치로 겨울과 삶을 이기려고 하신다. 겨울 끝에는 새봄이 기다린다. 할머니의 얼어붙은 삶 속에도 새봄이 찾아오면 좋겠다. 손님이 없어서 한 줌 더 준다는 할머니의 무거운 한숨을 찬거리와 함께 장바구니에 담아오는 내 발걸음이 무겁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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