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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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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 할머니의 한지공예수업


BY 그린플라워 2013-05-22

한달여 전부터 어떤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앞을 지나실 때마다

몇십년 전에 한지공예를 하신 적이 있으신데 꼭 다시 배우고 싶다시면서 말을 붙이셨다.

그 후 사흘이 멀다하고 지나다니실 때마다 똑같은 말을 고장난 레코드처럼 반복하시곤 하시는데 외우다시피한 말들을 듣는 건 고역이었다.

 

며칠 안보이시는가 싶더니 드디어 그저께 매장에 오셨다.

수업을 받으시겠다신다.

난이도가 높은 걸 배우시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비교적 쉬운 바구니를 만드시게 했다.

내가 설명하는 건 건성으로 들으시고 당신이 하시고 싶은 말을 쉴새없이 하시는데

잠시 전에 했던 말도 하신 걸 잊으시고 또 반복 또 반복... 게다가 풀은 덕지덕지 칠하시고

수전증이 있어서 제자리에 붙이는 것도 불가능한데다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조금씩 뜯어내야 하는데 손톱이 너무 짧아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한지공예를 하시려면 손톱을 너무 짧게 깎으시면 안된다고 말씀 드리니까

핑거네일이 긴건 못참으신다신다. 그러므로 풀칠하는 것 외에는 모두 내차지였다.

 

말씀의 요지는 같은 상가 2층에서 브레인을 좋게 하기 위해 니팅을 하시는 중인데

그저 메리야쓰 뜨기만 하면 간단한 것을 무늬도 좀 넣어서 뜨는 중인데

그게 매우 디피컬트 해서 실수 투성이라 심하게 지청구를 듣는 중이시고

같이 사시는 할아버지와 워킹을 가셔서

공무원 식당에서 저렴한 값에 식사를 잘하시고 오셨다고도 하셨다.

한지는 참으로 우수한 페이퍼인데 일본이나 중국에도 같은 게 있는지도 궁금하시다.

일본에는 화지라는 게 있고 중국에도 중화지가 있고 나름대로 종이를 이용한 공예도 발달해 있다고 말씀 드렸다.

 

이 상가는 언제 클로즈 하냐신다.

에브리데이 수업을 하시고 싶으실 정도로 너무너무 인터레스팅하시다신다.

 

도무지 커뮤니케이션이 마구잡이로 일방적이시고 디스커션은 불통이시다.

 

한시간 수업하는 동안 반복되는 같은 말씀에

내 설명도 동일한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으므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제발 일주일에 한번만 오시라고 신신당부 드렸지만

자신은 막강체력이라 날마다 오실 수 있다셨다.

 

다음날 매장에 나갔더니 내가 만든 같은 작품을 들고 어딘가 가셨단다.

할머니께서 만드신 것은 물풀칠도 세 번 해야 하고 마감재 작업도 세 번 해야 하는데

비슷한 내 것을 누군가에게 선물하신다고 들고 가셨다는 것이다.

잠시 후 수업받으러 오셨길래 말씀을 드렸더니 물건을 찾아 오셨다.

옆 건물에서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수업을 받으시는데 그 선생님께 선물로 드린 것이라셨다.

 

일단 할머니께 어떤 것을 또 가르쳐드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제 만든 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일곱 개를 만드시겠다셨다.

후유~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졌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어제 설명드린 건 아무것도 기억에 없으셨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도 기억을 못하시는데 오죽하랴.

난 첫 수업처럼 다시 반복학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시느라 전주에 가셨으므로

저녁식사 준비도 필요없으니 매장 문 닫는 시각까지 수업을 받으시겠다셨다.

바구니 두 개를 또다시 똑같은 설명을 생전 처음 받는 것처럼 반복학습을 하는 중에

온갖 영어를 다 끼워 넣은 똑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하자니

두 개를 완성할 즈음에는 거의 그로키상태가 되었다.

 

세 개째 하신다는 걸 오늘은 그만 하시라고 했더니

플리이즈~~~~ 하면서 애원을 하셨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다 몸살 나시면 안된다고 말렸지만 사실 내가 몸살 나게 생겼다.

그 때부터 가시지도 않고 내가 다른 수업 준비를 하는 동안 똑같은 말씀을 다시 되뇌이시면서 안 가시고 버티셨다.

 

특정 종교인으로 날마다 전도활동을 하면서 온갖 면박을 다 받으신 게 몸에 배셨는지 눈치도 안보시고 막무가내시다.

 

나중에는 배달될 물건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댁에 가셔서 기다리시라고 떠밀다시피 가시게 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앞집 아가씨는 코미디가 따로 없다면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고 했다.

 

내일 또 오신다고 가셨으니 난 내일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고 있어야 주변에 사람이 붙는다’ 고 한다.

양로원에서 팔십세가 넘으신 할머니들께 한지공예 수업을 하면서 주변에 할머니들을 보면서

어떻게 늙어야 곱게 늙을 수 있을지 터득하게 된다.

 

내 노년이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