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먹을 김장김치 하러 시댁가는 날
새벽에 맞춰놓은 알람에 어거지로 눈을 뜨고 대충 차려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교통카드 잔액이 마을버스 타는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게 생각났다.
어제 충전을 했어야 했는데 승용차로 오는 바람에 못한 게 화근이다.
그 시각에 동네수퍼가 문을 열었을 리도 없고
어쨋든 환승할인을 받자면 지하철역에 가서 충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역에서 충전을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자니
날도 춥고 아침식사도 거르고 나왔으므로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버스로 갈아타기로 했다.
지하철 플랫홈에 내려서서 커피나 한잔 마실까 싶어 자판기 앞으로 갔다.
어느 부부가 커피를 뽑아마시려다 자판기 속의 컵이 떨어져 커피만 주르르 흘러내리는 걸 보고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때도 오지랖 넓게 나선다.
"홍익회에서 관리하는 것이므로 역무원에게 말하면 환불이 될 거예요."
부부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냥 포기를 하고 마는데 아침부터 기분 잡쳤다는 표정이다.
혹시나 다른 커피자판기가 있나 둘러보니 근처에 또 커피자판기가 있다.
한잔을 뽑아 마시려다 아까 그 낭패스러워 하던 이들이 생각나 한잔 더 뽑아들고 가서 마시라고 줬다.
사당역에서 신림방면으로 2호선으로 환승을 하고 신림역에 내려 안내판을 보니
신월동방면 버스번호가 적힌 곳이 4번 출구인 게 보였다.
한참을 걸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거의 빈차에 올랐다.
지금까지 마을버스나 지하철 오르내릴 때까지 꼬박꼬박 카드를 찍었으므로
오늘은 왜 이리 잘나가는 걸까? 하고 신기해 하며 가고 있는데 목적지가 나올 법도 한데 서울대정문을 향해 가는 게 아닌가?
'아니, 이 버스 여러 번 탔어도 이런 일은 처음인데... 혹시 가는 길에 들러가게 바뀌었나?'
서울대정문 앞에서 모든 승객이 다 내리고 기사아저씨도 내리시면서
"여기가 종점이예요."
'에그머니나, 오늘도 또 대형사고 쳤네.'
늦게 가서 어머님께나 형님께 눈총 받는 건 둘째치고라도
아침밥상에 올리려고 갖가지 싸들고 나선 반찬이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그냥 그 버스에 있다가 다시 출발했다.
시댁이 가까워질 무렵 새벽 두시까지 공부 안하고 탱자탱자하는 아들 걱정으로
잠못잔 눈이 붙으려하는 걸 꾹 참고 가다가 잠깐 졸았나 보다.
여성발전센터라는 버스 안의 멘트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황급히 하차를 하는데
나답지 않게 그 와중에도 카드는 찍었다.
그리하여 1400원으로 목적지에 도착.
시댁까지 20여분 남짓한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 시댁에 들어서니 배추를 뒤적이시는 어머님과 마주쳤다.
늦었다고 꾸중하실 줄 알았는데 "일찍 오는구나." 하신다.
부엌문을 열자 형님과 세째동서와 막내동서가 아침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형님은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한다.
"반찬 가져왔지? 난 자네보다 반찬이 더 반가워."
배추국과 김치와 김만 달랑 놓여졌던 밥상에 낙지볶음, 녹두전, 꼬막, 진미채무침, 깻잎, 토란대들깨볶음이 더 얹어져 풍성해졌다.
아침식사가 늦어진 덕분에 나도 함께 내가 가져간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1000원 아껴보려다 온 식구들에게 빈축을 살 뻔한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논스톱으로 택시를 타는 한이 있어도 늦지는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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