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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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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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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만 봐도 떠오르는 그때 그 시절


BY 그린플라워 2006-08-28

백마 화사랑

내 젊은날 삶의 한부분을 튼튼히 지탱시켜주었던 버팀목이기도 했던 장소



직장생활의 새내기 시절 여러가지 생소한 부대낌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던 그 시절

잠시 잊어가고 있던 도깨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모월 모시에 만리동고개에 있는 육교 중간에서 만나자는~~~



도깨비선생님은 고3때 서양화를 잠시 가르쳐주셨던, 하는 짓마다 엉뚱해서 내가 붙여드린 별명이었다.

그 선생님의 명에 따라 그 고갯마루에서 하차를 하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시자마자 도로 타고온 버스에 태우는 것이었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으시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슨 전리품 보여주듯 어제 마신 술의 뚜껑이라시면서 소주병뚜껑 여섯개를 보여주셨다.

기차를 타고 한 삼십분 가서 백마역에 내리자 철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철길 옆에 초가집 한채가 오도커니 보였다.

한지로 만든 등불에는 한자로 畵舍廊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안에 들어서니 통나무등걸을 잘라 만든 탁자와 의자가 몇개 보였다.

안쪽 벽에는 석유드럼통을 옆으로 뉘어놓은 짚이나 장작을 태울 수 있는

소박한 벽난로도 있었고, 드문드문 미술작품도 놓여 있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다리가 조금 불편한 주인장이 나와서 반색을 하며 우리를 맞이하고,

항아리에 동동주가 담겨지고 표주박이 띄워진 채 나오고,

술을 전혀 못하는 나를 위해서는 커피도 한잔 따라 나왔다.

커피한잔에 오십원하던 그시절--벽난로에 태우던 짚 한단이 사십원이란다.

우리가 팔아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짚을 태워가면서 참으로 진솔하고 맑은 얘기들이 오갔다.

주인장도 홍대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 후로 바쁜 직장생활에 시달리다가 같이 갈 만한 친구나 직장동료들과 그 곳을 찾거나

그러지도 못할 여건이면 혼자서라도 가끔 그 곳을 찾았다.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신변잡기도 끄적이면서

내 삶의 고통을 그 곳에서 풀어가곤 했던 것이다.



짚불은 참으로 따스하고 정겨웠었다.

내 모든 시름을 그 짚불에 다 던져버리곤 하면서 배화교 신자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주인장님은 나와 도깨비선생님이 연인 사이인 줄 아셨다고 하셨다.

내가 조금만 빈틈을 보였더라면 그리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못 된 삶을 살아왔었다.

고3때 화학과나 수학과 가려던 진학진로를 미술로 급회전하던 바람에 남들보다 몇배 더 그림에

빠져야만 했었으므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었는데...(내 삶은 그 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친구분이셨던 그 도깨비선생님은 이따금 오셔서는 친구들에게 목례나 간단히 하시고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시다가 또 말없이 사라지시곤 하셔서 오시던가 말던가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었던 분이셨다.

아주 작은 키에 미소년처럼 생기시고 늘 버버리코트 주머니에 두손을 넣고

다니셨으므로 손조차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분이셨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내 뒤에서 물끄러미 그림 그리는 걸 보시곤 하시는 게 아닌가?

신경이 예민한 난 뒷통수가 스믈거리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자니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참았다.

그러기를 며칠 하시더니 화실의 선생님이 외출하고 안 계신 틈을 타 내게

"내가 니 그림 손좀 봐 줄까?"

하시는 게 아닌가!

벙어리거나 아님 자폐증환자일 거라고 여겼던 그 분이 그러신 거라

난 엉겹결에 내자리를 내어드리고 말았다.

붓을 넘겨받으신 그 분은 내 그림을 완전히 망치기 시작했다.

난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못해 그 분을 밀쳐내고 싶은 충동을 견디느라

힘겨울 즈음에 그림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림의 강약이 뚜렷해지면서 생생한 실물을 보는 듯한 그림이 되어가는데~~~

그 후로 난 완전히 그 분 '팬'이 되었다.


그 후 우리 선생님이 지방에 며칠 가실 일이 생기셨는데 그 도깨비 선생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듯이

그동안 날마다 와서 내 그림을 손봐 주셨다.

돌아온 선생님은 변화된 내 그림을 놓고 도깨비선생님과 이젤까지 던져가면서 대판 싸움을 벌이셨다.

"왜 하필 그 아이 하나만 봐 줬냐고..."

난 더이상 그 화실에 다닐 수가 없어서 화실을 옮겨야만 했는데

응용미술을 전공하신 분께로 가게 되었다.

서양화를 전공하겠다면 독선생님이라도 붙여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옮긴 거였는데

어차피 대학 들어가면 응용미술도 해야 하니까 기초나 좀 해 두라고 하시면서 며칠 가르치시더니

중앙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미술실기대회에 나가보라고 하셨다.

난 그때까지 어디고 지원해서 낙방한 적이 없었는데 그 실기대회에 참여해 봤자 입상 못할 건 뻔하므로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경험삼아 나가보라고 간곡히 권유하시기에 떠밀려서 참가를 했었다.

결과는 '입선'...

나보다 선생님이 더 기뻐하셨다.

창의력이 별로 없는 난 나를 알기에 그래도 서양화를 고집했는데

응용미술로 밀어부친 선생님 덕분에 난 다섯개 대학에서 주최하는 미술실기대회에서

모두 상을 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냥 응용미술로 전공이 또 바뀌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입시를 두어달 남기고 화실 선생님이 입대를 하시게 되었다.

선생님 후배가 와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다른 애들은 괜찮지만 쟤는 좀 별나니까 지가 손봐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지만

선생님 후배는 한성질 했던 고로 사사건건 내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비위가 상한 나는 화실에 가는둥마는둥 하다가 입시를 치르게 되었다.



다섯개대학에 입상한 상장사본도 제출하고 필기시험도 일반대학 갈 성적이었으므로

입시에 실패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대학 교수님께 사사한 학생들도 수두룩하게 떨어졌다는데

난 너무 그 체계를 몰랐던 결과였었다.

그래도 부모님께서는 후기에 입시지원을 해 두셨지만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다시는 미대 안 간다고 시험조차 치르지 않았다.

다음해 일반대학으로 진학한 나는 그래도 그림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를 못해서

도깨비선생님이 운영하시는 화실에 다니면서 서양화를 취미로라도 하곤 했었다.



도깨비선생님은 다시 나를 꼬득이기 시작하셨다.

"너 이 재주 썪히면 너무 아까우니 휴학하고 다시 그림 그리자.

필기 실기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내 후배 만들어주마"였다.



동생이 넷이나 줄줄이 있는 맏이인 난---

그 선생님은 그시절 유명하던 대성학원에서 서울 법대간 친구들조차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물어오곤 하던 거의 천재에 가까운 학생이셨고 그림도 특출했으므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 선생님 말을 믿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그 뜻을 따르지는 못했다.



그 선생님이 서울대 입시에 실패를 한 것은 그림이 너무 튀어서란다.

홍대에서는 그걸 받아주었는데, 수업을 받으면서도 영어시간에 가만히 일어서서 있었더니

교수님께서 "왜 그러고 있느냐?"고 하셨는데,

"다 아는 내용이라 나가봐도 되는지 여쭤보려고 했다"고 하니

그 멋쟁이 교수님이 그러라고 하셨단다.

결과는 A+--그 일화로 다시 유명해지시기도 하셨단다.

미술원서를 동화책 읽듯이 술술 읽어나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맘에 들게 그려진 그림이 하나 있었으므로 액자에 넣기 위해 그림을 찾으러 가니

한학기 등록금 내주신 친지분께 선물로 드렸다는게 아닌가.

악연의 연속이었다. 

그 일을 빌미로 그 화실은 발길을 끊고 말았다.



화사랑으로 인해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듣던 그 시절에 또다시 그 도깨비선생님은

"지금이라도 그림공부 하자"고 하셨다.

그 때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하던 때였으므로

죽을 때까지 못버릴 그림에 대한 미련이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평생 화구정리도 해주고 붓도 세척해 주면 안되겠니?"하던

일종의 청혼을 야멸차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나대로 먹고살기 바빠서, 일중독에 빠져서 승승장구 잘 나갔으므로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압구정동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또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에 그 선생님은 연상의 동양화가와 동거를 하는 중이었다.

그 화실에 가서 그 여자분도 뵈었는데

안주도 거의 안 드시고 술로 버티시는 선생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왜 안 말리시냐고 하니

그 동양화가분은 못말리는 주벽이시라고 그냥 맘 편히 드시게 할 뿐이라고 했다.

결국 얼마 후 술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소문을 돌아가신지 꽤 된 후에야 들었다.



이제는 재개발로 인해 그 옛날의 푸근했던 화사랑도 사라지고, 오래도록 내 삶의 언저리를 맴도시던 도깨비선생님도 가셨지만

기차만 봐도 그때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내 젊은날의 갈증을 풀어주던 곳, 내 모든 시름을 다 태워주던 그 짚불의 불꽃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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