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붙잡지 않아도 너무나 잘간다.
어떨땐 내가 시간이 되어서 빨리빨리 어디론가 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시계 바늘끝에 매달려서 그때로 되돌려 볼려고 애쓰는 자신에게 화가 날때도 있다.
채와 결혼한 그남자는 잘살고 있을까?
그남자 때문에 모든것을 접고 낯선섬의 파란대문으로 들어왔는데 잘살아야지
나도 그남자도.......
원망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가 자꾸만 나를 다독거린다.
옆집 세딸들의 엄마가 바쁘게 왔다갔다 한다.
배를타고 나갔던 그여자의 남편이 나흘만에 돌아오는 날이다.
오늘따라 늘 흘리고 다니던 실없는 웃음도 없다.
긴장한듯 그여자의 행동들이 다 어수선해 보인다.
이 섬안의 집들은 아주 낮은 돌담들이 집을 감싸고 있다.
거무스름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남은 곳곳에 구멍이 송송 나있다.
아주 작은 구슬같은 구멍부터 어른주먹만한 구멍까지 다양하다.
가끔은 그구멍사이에 검고 작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사람을 노려보기도 한단다.
지금은 없어진 그림이지만
그 검은 돌담 너머로 마을의 모습이며 선착장의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한참을 그여자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궁금증이 일었다.
그여자를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가 보았다.
두손을 모아쥐고 초조해하고 있었기에 말을 붙일수가 없었다.
그냥 그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한40분이 지났을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낡은 배 한척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릴때마다 선착장에 묶어놓은 배는 출렁거리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멀미가 나게했다.
고목나무같던 그여자의 남편이 한사람의 부축을 받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고 두툼한 입술은 파랗게 질린채 떨리고 있었다.
놀란 얼굴의 그여자가 남편의 손을 잡고 울기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보였는데.....
그남자의 발목이 수건으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많이 다친것일까?
사람들이 모여들자 한건장한 남자가 그여자의 남편을 들쳐 업고 보건소 쪽으로 향했다.
보건소라고는 하지만 의료기구라고는 없는 요샛말로 무늬만 보건소였다.
아쉬울때만 급할때만 이용하는 그런곳이었다.
섬밖으로 연락을 하면 한두시간정도면 의사와 간호사가 커다란 검은 가방을 가지고 배를 타고 들어오곤 했다.
그여자를 따라 보건소로 들어갔다.
그여자는 회색 캐비넷에서 주사기와 조그만 병들을 꺼내 남편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 손놀림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여자는 여기 이섬에 들어오기 전까지 뭍에서 간호사였다고 했다.
뭍에서 온 간호사와 의사가 보건소로 들어간지 3시간이 지나고
그여자는 두눈이 벌겋게 충혈되어서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한동안 그여자는 누가 옆에서 안부인사만 해도 두눈에 눈물이 고이곤 했다.
그여자의 남편은 발목을 잘라야만 했다.
배에서 일하다 발목이 그물에 걸렸는데 그 그물이 발목을 파고 들어가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잘 알수는 없으나 절단하는 편이 2차감염도 막을수 있고 어쩌고 하는
이유때문에 절단을 했다고 했다.
의사들은 너무 어려운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는것 같다.
그여자의 남편도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그집에서 온전한 신체를 가진건 그여자 혼자 뿐이었다.
그남편이 목발을 짚고 걸어다닐때쯤 그여자의 얼굴에서는 또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내눈에는 왠일인지 그웃음이 서글퍼 보였다.
내마음이 서글퍼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여자에게 웃고 사는법을 배운다.
그여자는 가르쳐주려 애쓰지 않고 나역시 배우려고 애쓰지 않지만
연스럽게 그여자의 웃음이 나에게로 스며들고 있었다.
파란대문으로 들어서면 적막하다.
기분이 좋을때도 적막하고
기분이 나쁠때도 적막하다.
전보다 그여자와 많이 친해진 나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내것이 아닌것 같은 것들을 그여자에게 주기로 하고
오래된 낡은 장롱을 열어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다가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편지 4통을 찾았다.
한참을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뛰지도 않았다.
벌써 다 잊혀진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참고 있는 것일까?
별들이 가득한 하늘색 편지가 눈에 띄었다.
그남자의 군복입은 사진이 무릎위로 떨어졌다.
그남자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하얀이를 드러내고 웃고있다.
그웃음이 나를 떠날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면회오지 않을래? 우리 내무반에 네사진을 보여줬더니 다들 부러워 하네.
얼마나 보고 싶은줄 아냐? 꼭 면회 왔으면 좋겠다.
여기는 별이 너무 많다.
하늘을 보면 내가 천사가 되는것 같다. 너도 이별들을 보면 좋아할것 같다.
건강하고 또 편지할께.."
나는 면회를 한번도 가지 않았다.
그남자가 제대를 할때까지도....
가고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여러가지 핑계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에
선뜻 그먼길을 갈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남자에게 너무 미안했었다.
"선아 엄마. 간호사였다면서?"
그여자는 선한 웃음으로 답을 했고 옛날 생각을 하는듯 보였다.
그여자의 세딸들은 그여자의 모질었던 과거였다.
지금의 남편과는 내가 이섬에 들어오기 2년전에 알았고 바로 동거를 시작했다고 했다.
친아버지가 아닌 그여자의 남편은 세딸들에게 잘해줬고 아이들도 다행히 잘따랐다고 했다.
그여자는 그남자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목발신세가 된것도 자기와 세딸들 탓인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세딸들 역시 한아버지가 아니었다.
결혼하기로한 처음남자-그러니까 진아의 아빠가 된다-는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였는데 병원을 차려주겠다는 돈많은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단다.
돈많은 집 딸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었다.
혼자서 진아를 낳고 주위에서 속닥거려도 꿋꿋이 병원에 다녔는데
병원에 왔던 환자중 한명이 진아를 친딸이상으로 키우고 사랑하겠다면서
사탕발림을 한 모양이었다.
많이 힘들고 외로웠는지 그남자의 말들이 다 진심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그래서 동거를 시작했는데 선아를 낳고 미아를 가졌을때 도망치다시피해서
집이며 살림살이며 직장이며 모든것을 버리고 이섬으로 왔다고 했다.
그남자는 자해공갈단에 사기꾼이었는데 그때도 보험금을 타먹을 욕심에
자기를 해하고 병원에 온 것이었다.
같이 있는동안에도 일을하기는 커녕 아이들을 때리고 그여자에게는 입에도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다가도 돈을 마련해 오라고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단다.
그렇게 삼년을 살다가 도망을 쳤다고 했다.
그여자는 말하는 동안 많이 힘든것 같았다.
돈때문에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믿음때문에 실망하고 아파했던 기억들이
그여자를 한동안 놓지 않았다고 한다.
섬에 들어와서 미아를 낳고 정말 거지처럼 못먹고 겨우겨우 살고있을때 지금의
그 고목나무같은 남편이 많이 도와주고 아껴주었다고 했다.
비록 결혼식은 못올렸지만 동네사람들의 부추김과 그남자에 대한 그여자의 믿음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한가정을 이우게 되었다고 했다.
그여자의 남편은 말수도 아주 적었고 화난다고 때리지도 않으며 더구나
욕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항상 그여자가 먼저고 세딸들이 먼저였다.
단지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그 뒤 그여자도 그남편을 따라 말보다는 웃음으로 대꾸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그여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항상 입언저리를 맴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예전의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등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다 잊혀졌다고 했다.
그여자의 지금 모습은 참 깨끗해 보인다.
그런 그여자의 모습이 내마음을 차갑게 적셔준다.
내가 취직해서 직장생활에 이력을 붙일때쯤 그남자가 제대하고 복학을 했다.
나도 바쁘고 그남자도 바빴다.
항상 보고싶고 얘기도 하고싶었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종이비행기에서 보자. 9시까지 와라"
언제부턴인가 그남자는 할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야말로 용건은 간단히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를 배려한것인지 예전만큼의 애틋함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수없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단둘이만 만나지 않았다.
주위에는 그남자의 학교친구들이 항상 둘셋씩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도 아무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채웠다 하고 있었다.
그남자와 그의 친구들은 새내기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듯했다.
속상하기도하고 초라하기도 했다.
술이 도무지 취하지가 않았다.
"그만가자. 니들 먼저가라 나는 이친구 데려다주고 가야겠다."
그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그남자는 술좀깨자며 걷기를 원했고 나는 아무말 없이 그냥 따라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불이꺼진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노란 가로등 하나가 저쯤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턱이 높은 어느집 담벼락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아무말이 없었다.
찬기운에 술이 깨는듯했다.
"왜 면회 한번도 안왔냐?"
그남자가 뜬금없이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망설였다.
"너무 멀기도 하고...... 편지 많이 써서 보냈쟎아."
어색한 변명에 어색한 시간이었다.
그남자는 나를 쳐다보더니 비칠듯 말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남자의 입술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느꼈다.
처음 해보는 행동이라서인지 서로의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가르고
잠시동안 이어졌다.
그때만해도 그남자와 머리가 하얗게 될때까지 서로를 잡고 있을줄 알았는데.....
그여자의 기억과 내기억은 다르다.
그여자의 기억은 두렵고 무서운 기억이고
내기억은 따뜻하고 설레이는 기억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여자와 내모습은 또 다르다.
그여자는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웃음으로 가득한 얼굴이지만
나는 슬프고 허전한 외로움이 가득찬 얼굴이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건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는데 그여자는 그기억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나느 그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쓴다.
나는 이섬의 파란대문 안에서는 그남자에 대한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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