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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시골아낙


BY 시골아낙 2006-05-30

 

한 이틀 연거푸 고마운 농사비가 내렸습니다.
모두들 봄비라고 말하지만 사과나무를 심어놓은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농사 비입니다.
흙과 함께 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항상 하늘과 함께 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너무 많이 내리면 많이 내리는 대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농사를 짓는 마음은 항상 하늘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고마운 농사비가 내리고 나니 온 들녘은 새싹들의 기지개 캐는 소리와 농부들의 부지런한 발놀림이 어우러져 소란스럽습니다.
울타리 담장의 개나리도 앞산의 진달래도 시원한 봄 샤워에 몸들이 모두 제 빛을 발합니다.
비 온 뒤의 그 청명함이 너무 좋아 넋을 놓고 밖을 보고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따르릉>
<여보세요>
<네..시골아낙 님이시죠?>
전화기 너머로 아주 여유 있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일품 쌀 20킬로와 흑향미 2되만 보내주세요>
<네..감사 드립니다. 오늘 도정하여 내일 배송 하여 드리겠습니다.

 

..시골아낙..

내가 지은 우리 농산물을 판매하는 내 다른 이름입니다.
이 시골아낙이란 꼬리표를 달고 우리의 먹거리를 알리고  판매한 지 5년..
단지 먹거리뿐만 아니라 고향의 향수를 알리는 노란 손수건 같은 존재로서..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우리 부부는 막막함과 함께 무소의 뿔처럼 참 저돌적이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5년 전..
10년의 도시생활을 접고 부모님계신 이곳으로 우리 4식구 둥지를 틀 때만 하여도 그저 전원생활정도로만 알고 따라온 시골생활..
아!...그런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로한 시부모님과 지천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는 일감들..
아파트의 편리함을 알아버린  도시아낙은 모든 게 개방적이고 해가 떠 있을 때는 밖에서 생활하여야하는 시골생활에 아연실색하였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셔야한다는 부담감으로 힘든 내게 안살림에서 농사일까지...
오죽하면 남편에게 아내를 한 사람 더 구하라는 농담을 다 했을까 싶습니다.
도시의 아는 이들은 햇빛에 얼굴 탄다고 썬크림을 바르고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썬크림을 바르고 일을 했지만 땀이 나는 시골생활에서 이 썬크림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땀을 타고 눈으로 들어와 눈이 따가워 바르는걸 아예 포기하고 맨 얼굴에 흙바람을 맞는 시골아낙의 길이었지만 이 길을 포기도 할 수 없는 나는 대한민국의 아줌마였습니다.


처음으로 지어본 고추농사..
남편과 겨울에 고추모종을 내고 혹여 어린 모종이 죽을까 어머님 군불 방에서 씨를 내다가
너무 방을 뜨겁게 하여 고추씨가 모두 익어버려 싹이 나지 않던 일..
하우스에 고추모종을 심어두고 깜빡하여 하우스 문을 열지 않아 고추모종을 모두 새카맣게 태워버린 일..
가지농사를 지으면서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하루도 쉬지 않고 가지를 따냈던 일..
양파를 수확하여 넣기만 하면 되는데 그 날밤 비가 와서 양파가격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그저 주다시피 내어버리고 펑펑 울었던 기억들..
농사가 이렇게 힘든 일 인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일화들입니다.
힘들었지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많은 손을 거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뭐든지 심어두면 파릇파릇 땅을 뚫고 올라오는 씨앗들을 보면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도시에서의 주부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풍성함의 실체를 농사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지어 놓은 고추를 장사꾼이 와서 그저 가져가는 게 너무나 가슴이 아파 도시민과의 직거래를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시의 아는 이들에게  아름아름 판매를 하였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껴 인터넷 판매를 생각하게되었습니다.
도시에서야 취미생활로 여겨 컴퓨터나 수영 이런 것들을 배울 수가 있지만 이 시골생활에서 어른들과 같이 사는 나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딸에게 조금씩 컴퓨터를 배우게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혼자서 겁없이 고춧가루를 들고 다니면서 좋은 고춧가루를 판매한다고 이곳저곳에 글을 올렸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웃음 나오는 무모함이었습니다.
그 무모함이 오늘의 우리 부부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람도 모르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홈페이지도 없이 혼자 무작정 고춧가루나 농산물을 들고 다니는 시골의 아줌마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니 거들떠보는 게 아니라 아예 상대도하지 않았다.
무슨 명품 같은 데는 많은 이들이 몰리면서 답 글도 많더니만 진정 이 땀방울의 의미를 모른다 말이냐...하면서 혼자 절망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시골로 들어와 살면서 마음이 많이 여리어진 우리 부부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힘들게 지은 농산물을 그저 장사꾼에게 낸다는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그리고 지금 내가 가고자하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를..
찬찬히 생각하니 급한 마음에 조바심을 내었던 것 같았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그제서야 눈앞에 놓인 시골의 모든 것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하늘과 흙과 그리고 시골의 사람들... 내 발 밑에 자라는 야생화까지...
그래 이거구나 생각하고는 그때부터 시골의 일상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내 평생 처음으로 거금을 들여 디지털카메라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남편 따라 들에 갈 때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소재를 카메라에 담았다.
하늘과 사람과 흙을...
내 머릿속에는 항상 그 날 그 날의 주제가 정해져 거기에 필요한 소재들을 내 머리에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가슴에 담아둔 것들을  블로그를 만들어 거기다가 쏟아내었다.
모두 잠든 시간에 나는 시골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시골의 자연을...고부지간의 이야기도...농사짓는 어려움도..
그리고 아이들 교육문제.. 그렇게 고향이 뭔지 모르는 도시민들에게 고향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갔습니다.
한 쪽에 농산물 장터도 만들어 항상 장을 열었습니다.


그러기를 3년..
차츰차츰 시골아낙이라는 사람을 궁금히 여기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고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향을 일깨워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어른들 모시면서 농사짓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젊은 며느리로서 겪는 아픔을 위로하는 인생의 선배님도 만나고...
그리고 도시의 힘든 생활에서 내 삶이 그들의 미래가 된다는 것도..
그렇게하여 우리의 농산물은 시골아낙이란 믿음과 성실로 매진이라는
행복의 열쇠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시골아낙은 지금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도시민들의 주 5일에 맞추어 그들이 마음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는 시골의 고향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름에는 무수한 별이 쏟아져 내리는 이 곳에서 잊고 살았던 개구리소리를 들려드리고 싶고...겨울에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을 전하여 드리고 싶다.
시부모님을 자식인 우리들이 끝까지 책임지고 모셔야하듯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이 시골을 자연분만 하는 산모의 고통과 같은 희열로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유년의 이 아름다운 삶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로 기억되게 하고 싶습니다.

<따르릉>
<네....시골아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