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헤드님 사진입니다)
오월이 본격적으로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산이
겨우내 웅크리던 허리가 펴지고 처음엔 아주 연한 연두색으로 보인다.
내가 지구에 살면서 가장 행복할 때가 지금이다.
왜냐하면 이 찬란한 오월에 울 엄마는 나를 낳고
보릿고개를 넘어 갈 때였기에 미역국도 제대로 못 잡수셨단다.
그러고 보니 울 집에서 조금만 걸어서 가면
청보리가 한참 바람결에 흔들려 바람결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때 태어난 것은 참 좋으나 울 엄마는 그렇지 못하셨기에
나 낳고도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해 젖이 부족했을텐데.
지금도 울 엄마는 나에게 그 애길 또 하고 또 하신다.
" 니가 내 젖을 많이 못 먹어서 몸이 약한거다'
다행이라면 내가 그 기억을 못하는 것일테고
아픔이나 상처로 남지 않았기에 이제야 이 말을 해도
별 유감은 없다.
그렇게 못 먹은 아이는 늘 잔병치레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늘 머리에 부스러기가 나서 헐고 나을 만하면 눈다래끼가 나서 한 쪽 눈꺼풀이 퉁퉁부어
또 나을만하면 옆 눈에 옮기고 그랬던 기억이 어슴프레 난다.
내가 살던 그 흙 집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었다.
집에는 마당이 없었지만 마당 대신 먼산 부터 가까운 논이나 밭이 경계없이 정원처럼
들어 앉아 개울 건너가는 마을로 들어서는 길까지 지금도 선연하다.
여유롭게 남고 넉넉한 것이 흔하지 않을 때인 만큼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기억이 그 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꽃피고 새울고 을긋불긋 꽃대궐이라는 동네에 울타리 없는 작은 흙집을 물어 물어 찾아 갔더니 내 기억에 남은 사진과 그 후에 남은 풍경은 전혀 다른 것에 또 이렇게 세월이 흘러 갔구나. 소리도 소문도 나지 않고 사라진 유년의 무덤을 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않았다.
잠시 자리만 옮겨 여기 내가 앉아서 먼 산 바라보는 지금 이 맘때
멀리서 이 나무 저 나무에 날개를 쭈욱 펴서 드높게 나는 새 한 마리를 보고 있으니
단지 아버지는 먼저 가신 것이고, 나는 좀 있다가 떠나도 괜찮은 순서를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아주 좀 먼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말을 먼저 골라보기도 했는데, 그 대답을 상상하다보니 내가 아들이 아니라서 좀 잘 난 척 안해도 되고, 그까짓 출세도 좀 못해도 돈 좀 못 벌어도 울 아부지 날 이해 해 주겠지. 여장부가 되지 못해서 대대손손 이름을 빛 낼 의무도 없고 그저 니 맘 편안히 잘 살다가 왔냐? 이렇게 환하게 웃으시면서 안부 물을 것 같으시다.
내 착각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니 더 아버지가 보고 싶다.
사진으로 봐선 울 엄마가 나랑 똑같다고 하는데 이건 어느 사진기사가 잘 못 찍었나
영 나랑 다르게 보인다. 입도 나보다 작고 눈도 나보다 약간 크시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아부지가 지금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오늘 울 엄마한테 전화를 한 번 드려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