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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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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훔친 적이 있었다


BY 천정자 2009-11-07

서울에 종로에 가면 종로서적이 있었다.
꼭 먼 햇수를 따진다고 해도 한 이십 여년 전에도 있었던 서점이었다.
나는 그 때 가장 가난한 때이기도 하지만 그건 울 엄마가 가난한 것이고 나는 울엄마 딸이라서 가난한 학생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도 부자는 아니다. 나의 부자관은 좀 다르다. 돈이 아주 많아도 부자가 좀 될까 말까 그런 수준이고, 땅이 아주 많은 부동산 부자라도 땅많은 거지들을 많이 봐서 그것도 아니다. 어려서 부터 가난한 기준에 걸려 가난하게 살다보니 나도 별 어렵지 않은 기준을 나름대로 선 그어 놓고 오늘은 떠들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영어 선생님이 숙제를 내 준 게 한 권의 영어책을 독해해서 노트에  써 오라고 했다. 숙제나 마나 별로 공부에 신경을 안쓰고 살던 나에게 영어 선생님은 유독히 무서워 했다. 까만 뿔테가 굵어 지금도 캐리커쳐를 그리라면 안경만 두껍게 기억만 남아 안경에 가려진 작은 눈은 자세히 생각도 안난다. 나만 무서워 한 것이 아니다. 나랑 같은 반도 아닌데 내 친구는 나보다 더 무서워 해서 숙제를 해오라는데 무서운 그 선생님 덕분에 영어책을 들고 독해를 하려니 하나 마나 골치가 딱딱 아픈 것이다. 노는 것이라면 상을 안 줘도 원없이 놀아 봤지만 이 놈의 공부는 왜그렇게 징글맞게 하기 싫은 지.
내 친구랑 나랑 둘이 머리 맞대고 궁리 한다는 것이 참고서를 베껴 가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름방학 내내 영어책만 들여다 본 다는 것이 좀 억울하고 어떻게 해야 잘 노나 그 궁리만 해도 시간이 모자른데. 언제 이 독해에 매달리냐는 나의 적극적인 주장에 종로서적을 찾아 간 것이다. 없는 것 빼고는 세상의 모든 책이 거기에 다 있을 것이라고 우린 그렇게 알고 있었다. 종로 맞은 편에 인사동인데 지금처럼 차도 안 다니고 널직한 도로도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 구석구석에 늙은 사람들이 오밀조밀하게 직접 만든 공예품도 솔찬하게 볼거리도 재미난 곳인데. 차라리 거기에서 실컷 구경하고 참고서를 한 권 사 둘이 같이 베끼자고 합의를 했다. 그 당시 학생운동 뭔 민주화운동 덕분에 인사동에 거리마다 걸개네 민중미술이네 민화며 골목 구석구석에 지천으로 전시회가 늘 열렸다. 귀천이라는 천상병시인의 부인이 한다는 그 골목도 어지간히 들락날락 하고 낙원상가 골목에 갖가지 떡만드는 구수한 내음에 홀려 내 친구와 나는 찻값에 군것질에 집에 돌아 갈 차비까지 몽땅 거덜 냈으니, 책 산다고 또 나오는 모범생도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구경은 공짜인 종로서적인데 한 번 가자고 터덜 터덜 건너 갔었다.  
우리가 찾은 참고서는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맨날 만화책 본다고 돈 가져가고 책 산다고 가난한 울엄마 주머니에서 얼마나 삥땅을 쳤는데, 나나 내 친구나 돈이 없어 피장파장이고 그냥 구경만 하다가 어찌 불현듯이 떠오른 생각이 하나가 잡히는 것이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하필 그 때 그 생각이 나는 것이다. 내 친구랑 나랑 열심히 그냥 보다가 그냥 들고 나가자는 것을 말 없이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고 받고 그렇게 들고 나오다가 책정리 하던 한 평범하게 생긴 어떤 아저씨가 우릴 부르는 거다. 우린 그 때까지 그 사람도 책을 고르는 손님인 줄 알았다. 우릴 데리고 들어가는 곳이 사무실도 아니고 무슨 작은 방도 아니고 수 만권 나란히 꽂힌 책장 바로 뒤에 나만 겨우 서도 어깨가 닿는 공간으로 우릴 들어가라고 한다.
"학생 어느 학교에 다니세요?"
먼저 묻는 말이 학교 이름을 대라는데, 그 당시 이런 경우를 처음 당한 일이라 우물쭈물 하니 얼굴만 벌개지고 속으로는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꾸어었나 별로 꾼 것도 없고 이런 일이 미리 보여 주면 오늘 종로서적에 안 올텐데.재수가 없어 하필 오늘 걸렸구나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그 직원은 별다른 말을 안하는 것이다.
"음 학생들 이거 참고서 살 돈 없으면 매일 오세요. 다음부턴 안 봐줍니다"
그 말하고 다시 나오란다. 꼭 내가 책이 된 기분으로 책장에 끼여 있다가 나 온 것이다.참 창피했었다.내 친구는 다시는  가지 말자고 그래 거기만 그 참고서가 있냐? 청계천에 헌책방이 한 거리에 그득한데. 그런데 진짜 개학은 가까이 오고 숙제를 안 해가면 그 무서운 영어선생이 어른어른 하니 그 아저씨 말대로 그냥 가서 보면 될 것이고 이왕에 가서 참고서를 베껴오자 그렇게 또 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다. 참고서를 실컷 보는 것은 좋은데 내 발로 내가 간 곳이니 영어참고서만 빼고 미술서적부터 문학인가 뭔가하는 코너에 코를 박고 하루종일 서서 있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종로서적엔 전문서적이 무진장 많았다. 고가의 비싼 원서들도 내가 사든 안 사든 구경은 공짜였으니 내 친구는 참고서 베끼고 나는 그 둘레를 빙빙 돌다가 눈에 걸린 소설책이나 간단한 수필이나 시집등을 원없이 읽어버렸다. 그 때 만난 책들이 지금도 기억나는 것들이 참 많다.불온한 금서들도 그 때 알았고, 그 유명한 세종대왕이 매독환자엿다는 것을 알았을때 그 충격도 느꼈고. 특히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들의 고통스런 출간 애길 알게 되었다.  미술화보집에선 붓을 들고 다니는 화가들의 붓질에 홀려서 한 참 바라보다가, 수채화 기법에 그려진 풍경화를 이리 저리 방향을 틀어 보다가 아하 !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시선이 틀려지는구나! 만약에 시험을 보려고 그렇게 책을 보라고 하면 기절하고 도망다닐 텐데 이런 저런 잡다한 세상들을  만나다 보니 여름방학이 끝나고 숙제를 제출하려니 영어선생님이 다른 분이 수업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 선생님 어디가셨어요? 했더니 영어연수로 일 년동안 미국에 있으실 거라는 말에 내 친군  괜히 종로서적에  서서 베낀 그 숙제노트를 집어 던지는 것이다.
" 야! 괜히 헛고생했다야?'
그 헛고생한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내 생전에 그렇게 길바닥에 주저 앉아 책을 누가 읽어 봤냐고 묻기만 하면 확실히 대답을 할 것이다.원 없이 해 보았다고.
살면서 무서운 대상은 한 가지는 있어야 하나보다. 그 영어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종로서적에 가지 않았을테니.그나저나 종로서적엔 사람도 끼여 넣을 수 잇는 책장이 있었다는 것을 비밀이었나보다. 창피해서 말도 못하고 내 친구랑 나나 누구에겐 입도 벙긋 안했으니 그런 곳이 있었다는 것도 전설처럼 전해질 지 모른다. 그 곳에 다시 한번 가고 싶다. 이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