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난 후 난 알았다.
남편은 아주 중증에 걸린 왕자님도 아니고 슈퍼급 왕자병이 있다는 것을.
난 못생기고 무식한 무술이 취급을 했다.
신혼 땐 초반이니 남편의 기선을 잡아놔야 뒷고생이 덜하다는 말을
뒷 집 아줌마는 늘 그렇게 잔소리 하듯이 그랬다.
앉아서 밥상 받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면
웬 반찬투정은 그리 심하냐는 것이다.
나 어릴적엔 반찬 한기지라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합창을 한 후 잘 도 먹은 밥이
밥을 못했네..이것도 밥이라고 해 온거냐?
그러면 난 먹지마..자기가 직접 해먹어..이랬더니 남자를 우습게 생각한다고 웃통을 벗으니
참 내 지마누라 앞에서 힘자랑 할 게 뭐 따로 또 있냐? 시큰둥하게 대답만 했다.
남편의 팔뚝에 굵은 문신으로 머리카락 한 선만 그어댄 여자를 그려놓고 SUPERMAN이라고 새겨진 것을 첫날밤에 보니 그냥 막 웃었다. 그거 뭐하다가 새겨?o고 그랬더니 친구들끼리 한 여너명 뭉쳐서 돌아다니다 보니 무슨 표시가 있어야 겠기에 했단다.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게 그 여너명이 지금의 조직폭력단과 같은 성격이었다.
나 만나니 도저히 도움은 안 될 거 같기에 부랴 부랴 그 조직에서 탈퇴를 했지만. 문신은 지울 수 없었다. 조직에서 발 뱃다고 말하면 뭐하나 친구는 영원히 안 바뀌니 툭하면 불려 나가서 곤드레 만드레 술에 취해 떡이 되어 들어오면서도 목소리는 온 동네가 쩌렁 쩌렁 울렸다.
철 모르는 마누라가 된 나는 더하면 더했다. 비록 공주병 근처에 가지 못했지만 살림도 돈도 모르는 것 투성이의 여자가 일을 저지르면 큰 일낸다.
시댁은 내 놓고 남편을 거들었다. 그러지말라고 하면서 뒤로는 여자하나 집안에 잘 못 들어와서 그런다느니 마느니 조금있으면 갈라지니 참 말도 탈도 많았는데. 내가 문제를 집는다면 남편의 사고방식이었다.
어렵지 않게 산 것은 잘못이 아니나, 나의 격에 맞지도 않게 씀씀이가 헤프고. 메이커가 아니면 입지도 않고, 먹는 것도 입에 맞지 않는다고 보는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곧장 던져졌다.
어이가 없었다. 나에겐 별 게 아닌 것이 아닌 전부였는데. 그렇게 하찮게 가르친 교육이 도대체 뭐였길래 함부로 음식대하는 거나, 함부로 사람 무시하게 하는 거나 나에게 다 충격적이었다.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할 게 아니지만, 못생긴 주제에 성격은 더욱 못생긴 남자였으니. 나로선 감당이 안 되었다. 뭐든지 어머니에게 모두 일러 나의 입장은 전혀 세울 데가 없었다.
차라리 가난한 남자엿으면 돈 많이 못 벌어 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게 낫지, 이건 생색에 버무린 생활비 줘가면서 그 돈도 방바닥에 휙 던지니 시부모가 달리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여하튼 난 하나씩 하나씩 검열에 들어가면서 난 과감히 시어머니와 대판 시시비비 다 열거하면서 남편과 분가를 요구하니 이게 그게 아닌 그냥 나만 나가란다. 그러면 해결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시니. 해결을 보자면 안 보고 사는 거 하나. 아니면 이혼인데. 이게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를 단어였다. 얼결에 그렇게 ?겨나서 방 얻어 살다보니 안 보고 사는 방법이 된 건데, 남편이 그제야 나보고 그런다 왜 나랑 안 살고 너 혼자 얘들데리고 궁상 떠냐?
내 사는 게 궁상이라는데, 그제야 한 됫 박 들어 붙듯이 한마디 했다.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났으니 이젠 자기한테 별 볼일 없는 거 아녀?
여자 필요하면 색시집에 가서 돈만 주면 잘 해줄 것이고, 니네 집에 돈많은 집이니께 설마 밥은 안 해줄까. 그려 나 밥 잘 못하고. 살림도 잘 못하고 섹스도 잘 못해주는 여자니께.인제 우리 상관말고 살어. 애들은 크면 아버지 보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가라고 할테니까. 인제 워쩔 겨?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기가 생활비 안주고 그러면 지풀에 지쳐 집에 돌아올 줄 알았던거다. 그러나 그렇게 삼년이 다 지나가도록 나의 고집은 여전히 드세지니 그제야 사정한다. 제발 나랑 같이 살던가 아니면 다시 시집에 들어가자고 통사정 하는데 난 여지없이 고개를 도리질 했다.
어머니랑 애기는 끝났어, 한 번 나쁜 여느리는 영원한 거여...
정 나랑 살고 싶으면 자기가 나오면 되겄네.간단하쟎어... 또 어머니한테 가서 허럭 받을 려면 말만 무성해지니께 당신이 결정 혀. 나랑 살려면 시집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남편은 또 헷갈렸을 것이다.오냐 오냐하며 위해주는 부모님이냐. 아니면 성질 팍팍 내는 마누라냐?
그러거나 말거나 난 아이들 데리고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고, 저렇게 살아도 한 목숨인데
뭐 어디에 자대듯이 내 팔자가 왜이리 모질게 풀렸냐도 아닌 그냥 시간이 비켜주면 비켜주는데로 막히면 막히는데로 그냥 내비 둬 버렸다.
용 쓴다고 된 일이 오히려 부작용이 심했다. 뒷감당을 못해서 칠칠맞게 산 세월이 차라리 돌아보면 착하디 착한 인생이 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남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의 체면이나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으니 남편이라고 당장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당장 아이들 분유값 때문에 시작한 일이 내 직업이 될 줄은 몰랐고, 그렇게 천지간 분별이 안 되던 남편에겐 그 만큼의 시간이 허락이 되어 차츰 가정의 소중함을 알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딸내미가 갑자기 아퍼지니 아버지의 역활이 부여되어 정신없이 이 병원 저병원 들쳐메고 다니는 내 모습에 남편은 나를 안고 울었다, 나는 울지 못했다. 그 남편과 마주해서 울다간 내 목숨 내놓고 이 자리에서 딸내미 고쳐 내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폭력조직에서 빠져 나오면 그 성질도 당장 빼버리지 못한다. 나에게 주먹을 휘둘러 얼결에 맞은 나는 곧바로 파출소에 신고를 하니 얼결에 경찰백차에 나와 남편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또 길길히 난리다. 어딜 남편을 신고하냐고 주먹을 휘두르며 협박했다. 그럼 난 마누라라고 샌드백처럼 맞아주는 여편네처럼 보여? 맞고 말 못할 죄가 나한테 있는 겨? 나도 한 번 너한테 주먹으로 시시비비 가려 봐?
또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 왕자병이 재발한다. 그럼 난 쳐다보고 한마디한다. 자기랑 나랑 길어야 몇 십년밖에 같이 못 살 팔자여... 당신 쉽게 살자면 나도 쉽게 건너가면 그만인디.. 그런다고 나나 당신이나 별 수 없이 늙어...
남편은 이젠 어머니에게 가지 않는다. 물론 제삿날이나 집안 행사에 가지만 쪼르르 달려 가서 마누라 속 사정까지 일러 받칠 철부지는 아니다.
오랫동안 산 애기인데도 한 순간에 일이 다 해결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도 나와 엮어지는 일상에서 견뎌내고 감춰주고 꾸려나가는 것은 천천히 느릿느릿 움직인다. 속이 터지게 울어보는 게 최고소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에서 이렇게 느리게 자라는 희망을 알기에 감히 글자락으로 풀어 헤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