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내내 바람이 부는 곳’ 이라는 구절을 두꺼운 사전 크기의 안내서에서 보기는 했지만, 어둑할 무렵 거세어지기 시작한 바람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창문 밖으로 내려진 롤라덴(셔터)이 위아래 앞뒤로 요동치는 폭이 점점 커갔습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을 때에는 이미 늦어 가로로 늘어선 대들이 꺾여 들어가며 꺾임쇠 하나를 부러뜨리고야 말았습니다.
창을 가리고 있던 롤라덴을 다 올려내었습니다. 커텐 하나 없이 휑하게 뚫린 커다란 창들은 벽면을 그대로 열어놓은 듯 비엔나의 밤 풍경 앞에 고스란히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서둘러 불을 껐습니다. 어둠 속에서 바닥에 깔아놓은 매트리스에 누우니 언덕 아래와 맞은 편 언덕 위로 옹기종기 늘어선 가옥들의 불빛이 시야 아래로 사라지고, 커다란 하늘이 방안 가득 밀려 들었습니다. 구름과 달빛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검은 하늘, 그리고 구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묘한 음영을 만들어 내는 달빛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몰려 들었습니다. 창은 이미 사라지고 바깥 세상 어딘가에 나와 누워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애써 달빛을 외면하려 애쓰는 동안 어느 결에 잠이 들었나 모르겠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빠르게 차를 타고 둑길 같은 곳을 달려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 목적지를 향해…
토요일 아침, 거실에 먼저 나와 있던 남편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습니다. 눈 덮인 산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벌써 일 주일 조금 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본 창 밖이었지만 눈이 덮인 산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남편 옆에 서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밤새 불던 거센 바람은 먼 하늘의 구름들까지 모두 몰아낸 것인지, 지평선 끝에 청색으로 길게 누운 산들 사이로 손바닥 만한 하얀 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국에 있었던 지난 가을에는, 이상하게도 티롤 알프스가 시작되는 부근의 한 마을의 풍광이 자꾸만 떠올랐었습니다.
그것은 벌써 칠 년은 족히 지난 시점, 독일 퓌센에서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를 향해 가던 도로에서 만났던 풍경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차를 잠시 정차해 줄 것을 부탁할 만큼 인상적인 곳이었기는 한데, 왜 며칠이 지나도록 그 그림이 계속 떠오르는 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유럽에 다시 오게 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혹 더 나이 들어 잠시 여행차 온다 하더라도 그 지점을 다시 지나가게 되기란 어려울 일이었습니다. 가을이면 느끼게 되는 막연한 그리움의 감정이 잊고 있었던 한 '풍경’에 투영되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그 후 몇 달 뒤 유럽으로 다시 오게 될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런 저런 걱정거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게 될 아름다운 알프스의 풍광을 생각하면 기대가 앞서곤 했습니다. 혹시 알프스와 가까운 곳에 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는 알프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아름다운 자연이 가까이 있는 곳임에도 조금은 실망감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알프스를 떠올릴 만한 하얀 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안내서에서 ‘비엔나 시민들 대부분이 사용하는 물은 남쪽의 Schneeberg의 샘물에서 공급되는 것’이라는 구절을 본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눈덮인 산(Schneeberg)’이 근처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궁금해했던 것인데, 그 책 속의 산이 바로 지평선 끝에 보이는 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기심과 기대가 증폭되었습니다.
두 시간 쯤 후 나는 가족들과 함께 그 산을 향해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 있었습니다. 손에는 급하게 구입한 지도를 들고서.. ^^
귀한 토요일의 시간대를 한 사람의 '소원'을 위해 움직이게 된 온 가족을 위한 재롱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주행시간 동안, 또 목적지에 도착해서 혹시 쏟아져 나올 수도 있을 불평을 잠재우기 위함이었습니다.
'Schneeberg에는 Schneewittchen(백설공주)이 산단다'. '엄마가 슈니비첸인 건 알지?'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 뮤지컬에서 맡았던 배역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다른 학년에서는 백설공주의 계모역할을 맡은 적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동화를 통해 아이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없었음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고속 도로를 벗어나 산 쪽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서자 우리는 모두 색다르게 펼쳐지는 풍경을 두고 감탄을 연발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직 초목이 무성하지 않은 때임에도 겹겹이 펼쳐지는 산들이 주는 아늑함. 하늘을 향해 일제히 일어선 암벽들. 구불구불 완만하게 구비치는 언덕 사이로 펼쳐지는 긴 곡선의 길들. 그리고 눈 앞의 산들 사이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 오는 하얀 눈을 덮어쓴 산 하나.
마을 입구에서 '비엔나의 알프스'라고 쓴 팻말을 보기도 했지만, 눈이 덮인 높은 산이 주는 신비감에 작고 아담한 산들과 언덕이 주는 포근함까지 가미된 그 곳은 알프스 못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협궤열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오를 수도 있었지만, 산의 옆쪽 작은 스키장 입구까지만 다녀왔습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인지 스키장 입구에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의 그림을 그려 세워 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
아늑하고 포근한 신비감이 드는 그 곳에서의 작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구불구불 완만한 길을 돌아 빠져 나오면서, 내가 그간 가지고 있었던 '아쉬움' 또는 작은 '섭섭함'을 돌아보게 되었고 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씩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 지난 두 달간 급하게 마무리해야 했던 일들 속에서 나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처리하려고 애썼던 갖가지 일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모든 짐을 대신이라도 지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힘겨웠던 일들. 그 해결해야 할 많은 일들이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만 가는 것 같아 더욱 힘겨웠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감내하고 또 이겨내었으며 그 기간 동안 늘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신뢰했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일들이, 결코 어려워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은 경우에도 애쓰고 애쓰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시점에 이르러서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풀어져버리곤 하는 것을 보면서, 그 모든 일들은 나나 다른 사람들의 '수고와 애씀'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마다 그렇게 하시는 구나... 여기게 되면서도, 좀 더 빨리 좀 더 힘들지 않게 이뤄 주실 수도 있었을 일들을.. 되도록 최소한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효율적으로 이루어 주셨을 수도 있었을 일들을... 그처럼 마지막까지 갖은 애를 쓰게 하신 것이라든가..
주님의 뜻을 확실히 안다고 여긴 경우에 조차도 지름길 또는 직선으로 된 길을 가게 하는 대신에 이리 저리 돌고 또 돌며 다른 길들을 찾아 헤매게 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루곤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함 보다는 어떤 '섭섭함' 또는 '허망함'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주님의 도움을 구할 뿐 아니라 나로 하여금 헛되게 애쓰게 하시는 것 처럼 보이는 갖가지 '비용(노동, 시간, 돈.. 정신적, 감정적인 손실들)'에 대해서도 기꺼이 감수하며 감사한 마음을 더욱 많이 누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감사함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풍요로움'을 잃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 아침, 오랜만에 혼자 집에 남아 주부로서 보낼 수 있는 조용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가져 온 적은 수의 살림용품들 뿐이어서 오히려 정리되지 못한 채 여기 저기 흐트러져 어지러운 집을 하나하나 치우고 정리하고, 청소와 빨래도 하나하나 느긋하게 해 나가면서 느끼는 이 여유로움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지를 알지 못해서 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인지, 멀리 지평선 위에 기다랗게 누운 청색산들 뒤에 마치 구름인양 구름보다 빛나는 얼굴을 내민 Schneeberg도 보입니다.
이 자리에... 피아노만 하나 있으면, 딱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