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같은 써클에 속해 있었던 남학생 하나는 다른 친구들과 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먹고 살 만한 가정에서 잘 자라나 학업 문제, 취업문제, 연애문제 등이 최대의 관심사로, 학창시절을 나름대로 즐겁고 낭만적으로 보내려는 평범한 동기들과는 여러 면에서 조금 달라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가끔씩 불쑥 모임에 나타나는 그 아이를 두고, 여학생들은 '운동권'일 거라고 소근대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의 굵고 진한 눈썹, 가끔씩 빛이 나는 매서운 눈매, 굳게 다문 입술은 그 자신이 별로 말을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쉽게 말을 걸기 어렵게 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
그러나 늘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보아 당시 격렬하게 벌어지곤 했던 '데모'에 참여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로 그 점이 더욱 미스테리인 것처럼 여학생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두 개의 상반된 세계를 티내지 않게 오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지요.
무슨 일 때문이었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 친구와 둘이서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특유의 '묵직함'을 깨고,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꽤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부분은, 다른 친구들만큼은 먹고 살만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고자 했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 세상을 잘 알지 못하던 당시의 내게는, 충격으로 들렸던 것들입니다.
그 아이는 특유의 깊고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습니다. 같은 캠퍼스를 걷고 있는 아이들 중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새 학기를 맞을 때 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애를 태워야 하는 지 알고 있는지. 자신의 생명 같은 땅을 팔고 소를 팔아 힘겹게 한 학기 한 학기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농촌의 부모님들이 있음을 아는 지. 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점심을 해결할 돈이 없어 굶은 채로 수업을 듣는 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며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게 캠퍼스의 가로수에 길게 걸린 많은 현수막들 중 하나에서 얼핏 보고 지나쳤던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정확한 수치가 지금 기억에는 없지만, 상당수의 학우들이 굶고 있음을 알리는 글귀 뒤에 ‘도시락을 하나씩 더 싸가지고 옵시다’라고 써 있던 것이었습니다.
학교 행사나 서클모집과 관련된 많은 현수막 사이에 끼어 있던 그 문구들을 지나치면서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쯤으로 색다른 광고라도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친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아침에 캠퍼스를 오르며 그 현수막을 볼 때마다, 한창인 나이에 배를 곯을 학우를 위해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그 구체적인 ‘학우’가 주변에는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등을 생각해보며 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그 아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요즘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인함인듯 합니다.
그 기상이나 진지한 고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얼굴이 주는 인상이 서로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모습을 기억 속의 한 친구에게서만 떠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책자를 살펴보다가도, 실린 인물 사진 중에서 조금만 비슷한 데가 있어도 그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가실 수 있었던 것인지...
대학시절 청문회 중계 화면 속에서 본 '그'는, 다른 의원들이 이 사회의 거인들에게 굽실거리며 질문은 커녕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을 때에, '정의'의 이름으로, '바름'의 이름으로 선, 독야청청 한 그루의 소나무 같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온 국민의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어 놓고, 이 와중에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 편, 저 편 극한으로 치달으며 ‘상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거친 말들, 냉혹한 마음들 속에서 국민들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아파하게 만든 ‘그’라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아는 '그'라면 끝까지 서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으로 인한 것이든 주변인들로 인한 것이든, 자신을 향해 호된 치욕의 비바람이 불어도 온 몸으로 맞으며 굳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극단적인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한 번 지도자였으면 끝까지 지도자로 있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두고 현 정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위험한 비난 일색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놓고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다시 갈갈이 찢어놓는 듯한, 또 다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가혹한 태도를 두고는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이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해프닝'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의 절절한 슬픔을 보면서, 그가 실현하려는 가치와 이념이 분단조국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떤 위험과 어떤 오해를 받기 쉬웠든,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닌 사람들 속으로 내려와 더불어 함께 나아가려는 소박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그'를 잃고 나서야 그리워하며 애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마음이 느껴져서 함께 울었고, 그저 민주주의 사회의 정부를 수반하는 최고지위의 지도자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다 바쳐 따르고픈 '성왕(聖王)'같은 참된 지도자를 원하는 듯한 우리 민족의 심성과 정서를 보면서 또 울었습니다.
정치와 관련된 사람들도 아니고 사람들의 실의에 빠진 아픔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종교계에서 조차 이런 저런 비난이 이미 죽은 자를 향해, 또 애도하려는 사람들이나 애도에 참여한 종교인들을 향해 쏟아지는 것을 보니 더더욱 마음이 아파옵니다.
크리스찬이 아니더라도 또는 어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내어 버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잘못임은 부모가 되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일인데, 끝없이 이곳 저곳에서 교리를 들먹이며 죽은 자를 또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 너희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들 믿는 자의 어느 곳에 두었기에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난을 일삼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를 무조건 추종하기만 하려는 자들의 마음보다도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삭막하게 하는 위험한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아들을 권좌에 승계시켜 독재 정치를 계승하려는 의도에 주변국들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들의 존립에 대한 불안을 무력적인 힘의 과시를 통해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그 폭력적인 힘을 두려워하게 하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힘으로 통제하려고, 또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적개심과 증오로 변환된 어두운 힘이 우리들 안에서 먼저, 이 편과 저 편으로 몰며 서로를 향해 의심의 칼날을 휘두르게 하는 일을 버젓이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 그러한 어둠의 일에 일부 영적 지도자들 마저 힘을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그 분의 나라는 그렇게 사람의 사람을 향한 사랑없는 호통과 정죄 섞인 비난을 통한 훈계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전에는 '그'가 아닌 그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파서 울었는데, 지금은 이 삭막함이 아파서, 타국에 있어서 그가 대통령이 되고 통치자로서 겪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옆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지나왔을 삭막함들이 느껴져서, 그를 포용하지 못하고 정죄만 하려는 권위의 마음들이 아파서, 이제야 그를 위해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는 지옥에 갔다'고 단정하는 말들 뒤에 있는 교계 지도자 안에 도사리고 있는 냉정한 마음, 그에게 애도를 표한 목사들과 장례식에서 특송을 부른 성가대까지 두고 '웃지 못할 일'이라고 조롱하는 말 뒤에 서린 냉혹함을 보면서, 이전에 나 자신 그의 죽음을 두고 교리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던 것을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영원한 주권자 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잘 알아서 단정하고 또 단정하는 것입니까...
어제 밤에는 아픈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워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시길, 용서하여 주시길, 사랑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연옥을 두어 죽은 자가 구원의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곳으로 묘사했는데, 어차피 산 자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일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 자체에도 구별이 없으신 분이심을 확실히 아니, 주님의 영역에서는 과거 또한 현재처럼 돌이킬 수 있는 것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