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을 골라 주어야 할 때가 훨씬 지났음을 알면서도, 또 뮌헨에서 배달 온 직후에 벌써 손을 보았어야 함을 알면서도, 연습에 지장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사용해 온 피아노가 탈이 났습니다.
삼 주 쯤 전, 연습 도중 현 하나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후로 건반이 튀어오르는 속도가, 그나마 연습할 만 했던 것이 연습이 점점 더 불가능해 질 정도로 현격하게 늦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달 초에 있을 마지막 콘서트를 앞두고, 더군다나 긴 분량의 소나타를 두 곡이나 해 내야 하는데, 연습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피아노를 조율했었던 조율사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도 있고, 조율비가 많이 비싼 사람도 있고, 또 조건... 즉 몇 명의 고객이 있어야 타 지방에서 내려오곤 하는 한국인 조율사..의 숫자 충족의 조건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새로운 조율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알음 알음이 아닌, 전화번호부를 통해서 조율사를 찾은 결과, 첫번 째로 눈에 뜨이는 번호의 전화를 통해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조율가격을 제시 받고 급하게 약속을 잡았습니다.
어제는 그 조율사가 피아노를 손 보아 주러 온 날이었습니다.
커다란 도구 상자 두 개를 들고 들어 온 남자는 들어서자 마자 피아노를 바라보며 이것이 자신이 돌보아야 할 '보물'이냐며 싱긋 웃었습니다.
익숙하고 꼼꼼한 솜씨로 음을 하나 하나 고르고, 조율할 때와 주의 사항들을 이야기해주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한 시간 여를 조율에 열중하던 그 남자가 내 피아노에 관한 칭찬을 시작했습니다.
야마하의 각 시리즈 모델들을 꿰뚫고 있는 그는, 내 피아노가 콘서트용으로 제작된 다른 큰 피아노들에 비하여 작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제조된 모델로서, 자신이 보기에는 '스타인웨이'의 음색을 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라고 말하면서, '단, 조율을 잘 하기만 한다면'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들여서 조율을 다 끝낸 그가 잠시 조율된 음들을 살펴보면서 피아노를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고객인 나를 두고, 현이 하나 끊어졌던 것임을 알지 못하여 가져 오지 못한 현을 가지고, 저녁에 다시 오겠노라하였습니다.
두 시간 쯤 후 다시 돌아 온 남자는 다시 현을 갈고, 청소까지 정성들여 마친 후,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십 분이면 현을 다 갈고 모든 일이 완료된다던 사람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시간을 잊기 시작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이 공들여 조율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존 레논 등 다양한 팝 가수의 앨범들을 잠시 잠시 언급하기도 하고, 내게 아는 지를 묻기도 하며 시작한 연주는 한 시간이 지나도 끝이 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 연주 안에는 나 또한 상당히 좋아하는 엘튼 존의 아름다운 노래들 또한 숱하게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조율사가 아닌, 수준급의 재즈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이게 마지막 곡이다...는 말을 하면서도 몇 개의 곡을 또 지나고, 또 다시 마지막 곡이라고 하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남자의 손 끝에서 울려 나오는 재즈의 세계는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낭만적인 세계로 저녁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어지는 아름다움을 누리면서도, 나는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저녁 시간이 깊어가는데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말이지요.
그는 피아노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못내 아쉬워하며 겨우 일어서서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이미 음악을 통해 가까와진 기분이 드는 지, 설핏 기쁨과 함께 아쉬움이 보였습니다.
주고 간 명함을 보니, 이름 아래 쓰인 '클라비어슈티머 & 테크니커' 아래에 또 하나 '피아니스트'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아름답게 조율한 음들로 아름다운, 그가 말한 바 '서양의' 음악들을 한껏 보여주고 간 밤, 장난기가 슬며시 든 나는, 실제로 내가 '원더풀'할 리는 없으므로 못 들은 척 했던 말을 놓고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우리집 피아노가 너무나 훌륭하고 멋지다고 여러 번을 이야기하더니, 한 번은 말끝에 ... like you are..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냐고 말이지요.
딸 아이는 엄마가 무슨 뜻인 지 다 알면서 물어 본다고 타박을 하고, 아들 아이는 그거 다 팁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며 엄마를 무색해지게 합니다. 한국 출장 중인 남편에게 전화 통화 중 물었더니, 동양여자라 귀엽다는 생각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한 소리라는 군요.
사실, 그가 엘튼 존이 독일에서 공연했던 것을 보러 간 것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노래한 그리스 남자도 역시 '호모 섹슈얼'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나는 잠시 이 남자도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해가 짧아진 지라 어두워지고 한참이 지났는데, 일어설 생각을 않은 채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싶어하는 그를 두고, 혹 나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게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쩍 들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서양사회에서는 그런 경우들이 꽤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든 두려움, 전혀 의외의 상황 속에서 낯선 남자와 거실에 둘이만 계속 있는 상황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이 그런 경계심이 들게 했던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다 틀린 생각일 것입니다.
순수하게 음악을, 특히 팝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하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색의 피아노를 두고, 공들여 손 본 아름다운 음렬을 두고, 잠시의 음악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공유할 것 같은 사람과 잠시 따뜻한 마음으로 있고 싶었던 것이지요.
오늘 아침 열어 본 피아노는 그간 가져본 적이 없는 맑은 소리들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뮌헨에서 올라 온 이후로 첫 조율인 셈인데, 정성스러운 손길 앞에서 나의 둔탁하던 야마하는 그의 말처럼 스타인웨이가 내는 음색과도 흡사한 통통 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간과 높은 음역은 건반과 연결된 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현을 내리치고 있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맑고 청명한 음색을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율만 잘 하면.... 이라고 덧붙였던 그의 말은 정말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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