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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숙이 시집온 날


BY 모퉁이 2010-08-01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스물여섯에 시집을 가자 엄마는 다음의 몫으로

하나 둘 혼수(?)를 준비하셨다.

이불에 그릇셑트 몇 가지가 전부였지만 당시 엄마의 힘으론 큰 살림이었다.

그 살림 중에는 스무명은 족히 먹고도 남을 양의 밥을 할 수 있는 전기밥솥이

하나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전기를 꽂아 밥을 하니 전기밥솥이지

디자인이나 기능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한 물건이었다.

압력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참신한 것도 아니고

다만 끓어 넘치지 않게 밀폐할 수 있는 양쪽 잠금장치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솥은 두 아이 돌잔치 때와 집들이 때 요긴하게 몇 번 써먹은 게 다지만

버리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딱히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몇 년전에 쓰던 빨래솥에 구멍이 나면서

그 전기밥솥 내부를 빨래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밥솥이 빨래솥으로 신분이 하락해버린 것이다.

바닥이 두껍고 단단해서 빨래 삶는 용도엔 안성맞춤이긴 한데

밥솥으로는 컸지만 빨래솥으론 약간 모자라는 용량 때문에

빨래를 올려놓고는 딴짓을 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깜빡하면 끓어 넘치는 바람에 빨래 삶는 날은 가스렌지 청소하는 날이 되기 일쑤였다.

그럴때마다 소원하는 한 가지.

'언제 빨래 삶는 삼순이를 하나 사야겠다.'

그렇게 벼르기만 할 뿐,삼순이는 우리집 식구가 되지를 못했다.

잘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빨래솥에 구멍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전에 재활용더미에서 노란 양은들통을 하나 주웠다.

아직 멀쩡한데 왜 버림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한동안 불 위에서 고생을 했는데

이제 그 수명이 다 되었는지 바늘구멍같이 아주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겨 못 쓰게 되었다.

 

올해 마늘 값을 보고 놀랬다.

마늘장아찌 담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비쌀줄 몰랐다.

하루하루 미루다 금값이 되어버렸고

맘 먹고 경동시장까지나 갔는데 오늘 일요일은 경매가 없어서 쉰단다.

나선 걸음이 아쉬워서 마침 문 열어놓고 선풍기 바람에 졸고 있는 가게에서

거금 들여 석 접을 사서 돌아오는데

가전마트 앞을 지나게 되면서 믹서기를 바꿔야겠다던 계획이 떠올라

차를 돌리게 되었다.

매장 안에는 눈을 현혹시키는 물건들이 많았다.

문짝에 예쁜 꽃그림이 그려진 대형 냉장고도 눈에 들어오고

김치냉장고도 잘 차려입은 처자처럼 늘씬하게 서 있고

에고..지금은 때가 아니니 사고자 하는 물건만 사서 가자.

믹서기 코너에 가는 길목에 평범한 자태의 커다란 냄비가 하나 눈에 띄었다.

내가 그렇게 불러대던 삼순이였다.아니  삼숙이였다.

유리두껑에 큼직한 크기에 넘침을 방지하는 삼숙이를 우리 집에 데려오고 싶어졌다.

적당한 가격의 믹서기를 고르고 대신 삼숙이를 우리 식구로 들였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 우리집에 삼숙이가 시집을 왔다.

세탁기에 던져진 수건이 오늘 첫 시험대상이 되어주었고

분수같이 내뿜는 물과 거품이 뽀골뽀골 일면서

신기하게도 넘치지 않고 얌전하게  빨래가 삶아진다.

이제 빨래 올려놓고 지키고 섰지 않아도 되고

집게로  뒤집지 않아도 되고 가스렌지 청소도 줄게 생겼다.

찌그러진 세숫대야나 용도페기 직전의 솥단지를 빨래솥으로 쓰다가

나물도 한번 삶아보지 않은 새 솥에 수건을 삶아대다니

세상 참 좋아지긴 좋아졌다.

삼숙이가 세상에 나온지 하마 여러 해가 되었음에

이제사 내 식구로 들여놓고는

이 더운 날 빨래 삶으며 좋아라 헤헤 거리는 마누라를

저짬치서 쳐다보는 남자의 눈길이 등 뒤로 느껴졌다.

소소한 일상이 큰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