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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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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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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보류 중


BY 모퉁이 2010-05-04

시장 골목을 거의 벗어나면서 짧은 신호등 하나를 건너야 집으로 오는 길이다.

시장가방 든 손을 반대손으로 바꾸는 순간에 신호등 색깔이 바뀌면서

건너편에 서 있던 여자가 어깨에 길다란 통가방을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익어오고

그녀 역시 나를 알아본 듯 헬죽하니 웃으며 둘이 중간에서 만났다.

그러고 보니 화요일이다.

화요일은 서예교실에서 붓글씨를 쓰던 날이다.

일주일에 두 번을 나를 위한 시간으로 정해놓고

한번은 서예를 하고 한번은 볼링을 하러 다녔다.

초등학교 특활시간에 서예반에 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직장에서 취미반도 서예반 활동을 잠깐 하게 되면서

가로 세로 줄긋기는 초보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취미를 언제나 가져볼까 싶었는데

우연히 동사무소 주민센타에 서예교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작정 등록하고 한 3년을 결석없이 참 열심히 손에 먹칠하고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두어 시간 잡은 붓으로 얼마나 일취월장하겠냐만은

내 실력보다 재미에 빠져 허부적대다가

선생님 가르침에 힘입어 제법 칭찬도 받았는데

내 몸 한 구석에 생긴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받게 되고

그 후유증 잊고자 투입된 아르바이트 자리를 박차지 못하고 끌려 다니다 보니

서예교실은 결석이 잦아지고, 일 주일 이 주일 하던 것이 한 달 두 달 건너뛰고

어느새 두 해를 붓을 놓고보니 점점 나태하던 예전으로 돌아 앉아 버렸다.

아르바이트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니어서

서예교실은 마음만 먹으면 출석할 수 있는 날도 있는데,

그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아서 그만 붓을 말아버렸다.

오늘이 바로 서예교실 출석하는 날이었다.

글씨를 쓰고 나오던 옛날 글동무가 나를 보고 반갑게 웃어주었다.

멋적게 서서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시간나면 언제고 다시 가겠노라는 장담도 못하는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볼링도 그렇다.

한번 두번 빠진 날이 더 많다.

어쩌다 한번 다녀오면 며칠 팔몸살을 하기도 한다.

 

언제고 내게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중간중간 아르바이트에 임하느라 그 여유를 물리쳐야 했다.

무엇을 우선순위에 둬야 된다는 정의는 없다만

아르바이트는 약속이고, 취미생활은 여유에 치부되다보니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는 쪽에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

두 가지를 다 지키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니 어느 하나는 뒤로 미뤄야 한다.

붓은 언제고 꺼내 들 것이다.

볼링공도 시간 맞으면 들 것이다.

내 생활에 이 정도의 여유마져 끼어들 자리가 없다면 슬플 것 같아

지금은 잠시 보류해 놓았다고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