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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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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억지


BY 모퉁이 2010-05-04

"오이여 양파여 바나나여 무여~~~"

오랜만에 들려오는 소리는 버스종점에서 채소를 파는 아저씨 목소리다.

겨우내 들리지 않더니 다시 장사를 시작하셨나 보다.

일정한 시간에 동네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은 아는데

못 듣는 날도 있고,들어도 볼 일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갑자기 퍼뜩 지갑을 챙기게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절임배추를 주문했다.

고추는 아는 사람의 친정에 부탁을 해서 준비가 되었었고

무와 파 등 부재료를 이 아저씨께 부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참 이 아저씨가 은근히 서운해 하고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해마다 배추 스무 포기에 들어갈 부재료를 모두 구입하다가

절임배추를 사는 바람에 부재료만 부탁하니

그걸 어떻게 믿고 샀냐며 요즘 사람 운운하며 대놓고 그러셨다.

평소 말투가 퉁박하긴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그날,배추 외에 알타리 등 채소류는 그 아저씨 물건을 샀는데

계산을 하다보니 지갑 속에 돈이 딱 천 원이 모자랐다.

집에 갔다오기도 그렇고 해서

"아이구 어쩌지요? 다음에 만나면 천 원 드리면 안 될까요?"

외상은 안한다던 아저씨가 왠일인지 그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천 원의 빚이 생겼다.

사실 이 아저씨 동네 장사를 하면서 계산이 좀 짠 편이다.

끝전 100원도 다 챙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고추 하나 더 올려주는 법이 없다.

사과 하나 딸기 한 알 수박 한 쪽 맛보기가 없다.

그래서 인심 박하다고 소문이 나긴 했다.

그럼에도 시장에서 파 한 단을 사서 오다가도 아저씨를 만나면

감추고 싶을만큼 미안함을 느낀다.

 

아무튼 인심도 박하고 계산도 철저한 아저씨라 아마 수첩 어디에

00아파트 몇 호집 아줌마 천 원 미수금이 있다고 적어놓았을지도 모를텐데

겨울이 가고 김장김치는 빈 통이 하나 둘 쌓여가는데

나는 아저씨께 드릴 돈 천 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로 고의는 아니었고, 김장철 이후에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고,

근래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잊고 있었던 건 내 잘못이고,

아저씨는 돈 천 원에 사람 불러 달라는 소리를 못 했을 수도 있고,

늦으나마 이제라도 생각이 났으니 갚아야지.

 

손가락 빗으로 머리를 쓱쓱 빗어 넘기고 가디건 하나 걸치고 슬리퍼를 끌고

아주 전형적인 게으른 중년 아줌마 자태(?)를 하고는 나갔더니

예의 그 퉁박하면서도 수다스런 말투로 이것저것 사라고 재촉이다.

조금조금씩 남은 야채들이 있어서 지금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시다.

당근이나 좀 살까 했더니 그건 잘 팔리지 않아서 또 없댄다.

 

그건 그렇고, 제가 아저씨께 빚진 게 있었다고,,

작년 김장때 이러구저러구 해서 천 원 덜 드린 게 이제 생각이 났다고,,

늦게 드려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그러냐고, 몰랐다고,,는 하시는데 어째 표정은 언제 주나 기다렸다는 듯하다.

냉큼 받아 차곡차곡 겹쳐진 돈다발에 천 원을 더 얹어 또 세어본다.

마침 옆에 알타리무를 고르던 이웃댁이 옆에서 보고 한 마디 거든다.

"아이고 아저씨~00이 엄마 평소에 그렇게 팔아주고 하는데

천 원 깍아주시지 그걸 또 받으시네.

아저씨도 몰랐던 일인데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전혀 깍아줄 마음이 없는 아저씨한테 괜히 운만 띄운 이웃이 나를 보고 찡긋 웃는다.

깍아줄 마음이 있었다면 그날 계산이 마무리 되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깍아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고 나는 갚아야 되는 빚이었다.

한참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갚고 나니 정말 홀가분하다.

 

돈 천 원.

큰 돈은 아니지만 물건을 사고 파는 입장에서는 다소 다른 금액이 될 수는 있다.

금액이 크다고 해서 귀하고 적다고 해서 얕봐서도 안된다.

3자가 볼 때는 깍아줘도 될 금액일지라도 파는 입장에서는 피 같은 돈이다.

배추 무 상추 얼마를 팔아서 천 원이 남을까.

하지만, 가끔은 유연한 거래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 아저씨가

"됐어요..나도 몰랐는데...다음에 또 팔아줘요."이랬다면

나는 당장 필요치도 않은 야채를 또 한 바구니 샀을까.

이웃댁이 고르고 있던 알타리를 사서 계획에도 없던 김치를 담그느라

분주한 아침이 되고 있을까.

콩나물 봉지 여미기 전에 한 가닥이라도 더 담아주면 기분 좋고

저울에 올린 삼겸살 한 근에 끝전 몇 십 원이라도 떼주면 고맙고

순대 일인분에 간 한 조각이라도 더 올려주면 괜히 덤을 얻은 기분이 들어

다른 집 건너 그 집을 찾는 것이 우리네 심리인데 말이지...하면서

괜히 아저씨의 융통성에 불합격점을 매기고 있는 나..

이거 완전 억지지 뭐야.

 

 

뭐야?

당연히 갚아야 될 돈 갚아놓고 왠 궁시렁이야?

그러게 말이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래도 또 아저씨 물건 살거잖아..

그러겠지.

시장가기 귀찮고 당장 호박이라도 필요하면 슈퍼보다

아저씨 차를 먼저 기웃거릴거잖아.

그래...아저씨가 있어서 편할 때도 있잖아.

그래도 ....아저씨 좀 야박하긴 해.

뭐야?

오늘은 왜 자꾸 억지 쪽에 줄을 서고 싶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