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려고 해서 본 게 아니다.
요즘들어 나 만큼이나 자주 깜빡대는 남자가 자기 휴대폰을 두고 갔다.
난데 없는 전화소리에 보니 두고 간 남자의 전화였고
부득이 대신 들어 두고 간 전화라고 말해주고는
뜬금없이 솟구친 궁금증에 메시지 내용을 보게 되었다.
별시리 중한 내용은 없고, 싱겁게 보낸 오래 된 나의 메시지가 아직 남아있고
딸내미 어디쯤 오고 있다는 시답잖은 메시지 외에 여러 건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 중에 몇 건은 한 달 전에 올라온 조카에게 보내고 받은 메시지들이었다.
물론 일상적인 안부와 인사를 담은 내용이지만
평소의 남자답지 않게 참 많이도 주고 받았다.
나와는 보통 통화시간 1분도 안 되고 그것도 아주 드문데다
거의 통보 내지 확인 전화가 전부이고,
문자 역시 두 줄 쓰면 손가락 아픈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아이고...통화도 자주 메시지도 자주도 주고받았네.
아...이런 나를 질투 라는 말로 매도 하려나.
뭐 나도 중간중간 점검은 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일 배우느라 야근하는 날도 있다길래
그 날이 오늘인지 어제였는지, 특히 문단속은 잘 하고 다녀라,
늦잠 자지마라, 밤길 조심해라,참견 같은 말 뿐이지만 그래도 수시로 통화도 하고,
주말이면 집에 들러 밥이라도 먹고 가라, 반찬은 남았냐, 해 놓으마 가져가라 해도
부모 밑에 있을 땐 몰랐던 일들이 모두 내 일이 되어 주말이면 집도 치워야 되고
밀린 빨래도 해야되고, 쉬고 싶기도 하다며 다음 주에는 꼭 들르겠다고 했다.
그랬는데 남편의 통화기록이나 문자기록을 보니 내가 좀 서운하다.
객지에 내놓은 조카가 염려되어 챙기는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저녁마다 나한테까지 전화는 해봤냐, 문자라도 보냈냐 하더니
자기가 더 열심히 그 일을 해대고 있었네.
작은엄마와 작은아버지는 다른 촌수인지..
작은아버지는 3촌인데 작은엄마는 몇 촌인지..
작은엄마도 피는 섞지 않았어도 촌수는 섞었고
나 한테도 조카이고, 나도 자기 못지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남편이 한 발 물러나 있어도 내가 다 할 것이고 모두 내가 할 일인데
나를 못 믿는 것인지, 단지 조카를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로서의 임무인지
지나치게 챙기는 것이 슬쩍 얄밉다.
나름 자상한 남편이고 아빠라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형에게 밀리고 동생에게 양보하다보니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나는 말하는데
주변에서는 삼 형제 중에 가장 애살맞고 무난한 성격이라고 말한다.
같이 산 세월이 내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나보다 더 잘 아냐고 응수를 해보지만
본바탕이 어디 가냐고 내 말에 태클을 건다.
한 달 여를 일을 하느라 나도 나름 주말이 바빴다.
뒷산에 개나리가 핀 것도 모르고 4월인데 뭐가 이래 춥냐고 툴툴 댔었다.
오이소박이를 담고 양배추를 찌고 친구가 보내준 멸치젓을 갈아서 양념을 하고
통마늘 장아찌를 꺼내서 점심 상을 차리다
누가 시킨 듯이 싱크대에 옹기종기 쌓아 둔 반찬통을 채웠다.
멸치조림도 남았고 오징어포 무침도 남았다고는 하지만
매끼 마른반찬에 밥이 넘어갈까 싶어 나도 그동안 마음이 쑥쑥했다고.
미쳐 버리지 못하고 던져 둔 작은 아이스박스가 이럴때 참 요긴하다.
얼음팩도 혹시나 싶어 얼려둔 걸 나 스스로 칭찬해 본다.
여분도 없이 꽉 채워진 박스를 내보이며 불시 방문을 모의했다.
내 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 들이는 남자.
좋아하는 야구도 안 보고 기꺼이 짐을 들어주고 실어주고
나는 미쳐 준비도 안됐는데 남자는 이미 자동차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린다.
아이구...바쁘기도 하지.
주말이라 어디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딸애의 말을 뒤로 하고
혹시 필요한 뭐가 있을까봐 묻는 전화를 했더니
필요한 것 없다고 극구 사양은 하는데
여자 방에 필요한 전신거울을 떠보니 그건 없단다.
그리고는 지금 외출중이란다.
잠시 갈등이 오간다.
다음 주에 온다하니 그때 가져가면 되겠다는 것은 내 생각이고
이왕 준비했고 마음 먹었으니 집 앞에 두고라도 오자는 남자의 마음을
내가 어찌 거역해야 될 지,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바깥바람이 이렇게 달라진 줄을 모르고 지낸 사람은 나 뿐인가.
자동차는 밀리고 밀려 움직일 줄 모르고
평소에도 한 시간은 더 걸리는 거리기는 하지만
나들이 객들로 인한 교통체증으로 언제 도착 할 지 아득하다.
밀리는 길 피해 옆길로 들어봤지만 그 길도 밀리기는 마찬가지.
마트에 들러 거울을 사고, 조카 집이 가까워서야
초고추장을 만들어 놓고 담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브로콜리와 돌나물을 좋아해서 간단하게 찍어 먹을 소스를 만들었는데 말이지.
주인은 없고 밖으로 나와있는 보일러실 옆에 거울과 반찬통을 두고간다는
메시지를 띄우고 다시 그 복잡한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진이 다 빠진 휴일 하루.
"00아빠! 혹시라도 말이야. 나 한테 서운하단 말 하지 말어.
나 @@이 한테 소소한 것 까지 다 챙기지 못 할 수가 있어.
당신이 전화했냐, 문자라도 보냈냐, 매번 이런거 물으면 나 정말 섭섭하다.
숙제 검사하듯이 그러면 나 정말 힘들어.
내가 하는 반찬 좀 더 만들어 갖다주면 되고,
저 시간 되면 집에 와서 자고 가든 놀다 가든 하면 되는 것이고,
저도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고, 저도 할 일 있을 테니 너무 챙겨들지 말자.
안 할 말로 반찬도 그래. 요즘은 싱글족이 많아서 반찬 가게도 많아.
입에 맞는 거 조금 사 먹어도 돼. 해서 버리는 것 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작은아버지로서의 마음은 알겠는데 나 한테까지 강요는 하지 말어.
그렇다고 내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잖어.
엄마가 해 줄 게 있고 작은엄마가 해 줄 게 있는 거여.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해 볼테니까 걱정 하지 말고....
당신이 너무 챙기면 당신 땜에 어쩔수 없이 하는 사람 같잖어.
오늘도 그렇잖아. 분명히 외출 중이라 만나지 못할 줄 알면서
기어이 다녀간 것도 다 작은아버지 작품이라는 거 알면 나는 뭐냐고..
나 못 된 숙모 만들지 말어 이??"
친정조카 아니라서 쉽게 하는 말이라 할까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버렸다.
내가 뭐라 하냐며 큰 반응없이 들어주긴 했지만
그 것은 앞으로 잘 해주길 바란다는 뜻이 아닐까.
딸만 키우는 애비가 조카 하나 데려다 놓고는 딸 셋을 키우는 심정인가 보다.
그 마음 알다가도 가끔 지나칠 정도로 챙길 때는 나도 속 좁은 여자가 되고 만다.
시댁조카 친정조카 셋을 거두었다는 이웃이 내 사정에 잘 했다고 편을 들어준다.
잘 한 끝에 마음 상한다고, 자기가 경험자라고
지금 아쉬운 맘 들어도 나중을 보면 잘 한 일이란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처자 거두지 않았다고 탓 할 사람 없단다.
에구~ 내 맘 편하라고 하는 말인 줄 알지만 내 맘 들어주는 이 있어 고맙다.
그래도 좁은 속내 보인 것은 사실이다.
아,,다음 주에 올 땐 빈 반찬통 갖고 오라고 전화 한 통 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