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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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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다니던 길이 편하다.그러나...


BY 모퉁이 2010-03-08

나무에 귀를 대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순진하게시리 진짜 나무에 귀를 대본다.

아무 소리를 못 듣는 내게

아직 귀가 열리지 않은 탓이라는 말도 믿어본다.

겨우내 얼었던 계곡에 물이 흘러내리고

양지쪽 산수유 나무 끝에는 노르스름한 빛이

맘만 먹으면 언제고 튀어 나올듯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난주에 북한산 가는 길목에서의 풍경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은 북한산.

집에서 가까운 길만 다니다가 이번에는 다른 길을 택했다.

자주 가는 그 길은 어디쯤에 어떤 풍경이 나타나고

몇 분쯤 오르면 어디까지 왔다는 것까지 꿰고 있건만

이번 길은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가다보니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기도 했다.

우회하는 길도 있었는데 두 갈래길에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다리는 고생도 하고 편하기도 했다.

 

북한산은 도심에 있으면서도 매우 웅장한 산이다.

시작하는 길도 다양해서 선택의 기회도 많다.

한데 나는 돌아다니는 모험보다

가깝고 내 눈에 내 발에 익숙한 길을 고집하다시피 다녔다.

가끔 다른 길을 선택하는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야하고,

돌아오는 길도 늦어 하루를 예약해야 하지만

가까운 길은 느긋하게 시작해도 반나절이면 가능해서

게으른 나로서는 늘 다니던 그 길이 가장 만만하고 적당했다.

그렇게 적응되고 타성에 젖은 길만 걷다가

어제 다른 길을 걸으면서 만난 또다른 풍광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거기다 처음 걷는 그 길은 또 하나의 호기심을 돋우었다.

앞으로 나타날 길을 알고 걷는 것과 모르고 걷는 기분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로프를 타고 오르기도 하고, 암벽도 만나고,빙판길도 만나고.

미쳐 준비하지 못한 아이젠을 대신해 준 지팡이가 고마웠고

삶은 계란과 컵라면의 조화도 맛 보았고

늘 다니던 길에서는 내가 앞서가거나 뒤쳐져도 별 걱정 없던 남자가

낯선 길에서는 기다려주고 손 잡아주고 밀어주는 마음도 받았다.

 

출발선은 달랐지만 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제 내려가는 길을 각자 선택해서 헤어진다.

같은 길을 같이 걸어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가

다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길이

어찌보면 우리네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까지 가기도 전에 후퇴하는 사람.

목적지에 점을 찍고 온 길을 되돌아 가는 사람.

목적지에서 또다른 길을 더 걷는 사람.

출발점과 도착점을 다르게 선택한 사람.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각자의 길로 내려가자

그 넓은 산 속에 드문드문 인적이 잦아들고

결국엔 속절없이 울어대는 늙은 까마귀와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걸음은 지치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30년은 넘게 한 직장에 청춘을 묻는 지인이 다음 주에 정년을 맞는단다.

같은 길을 외곬스럽게 걸은 그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길을 걸어보지 못하고 한 길만 걸은 그 사람이

지금부터 걸어야 될 길에 두려움이 있을까봐 염려도 된다.

이것은 머지않은 날 우리집에 닥칠 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늘 다니던 길이 편하다.
돌아가는 길도 알고 있고, 지름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길도 하나 정도는 알아둬야 될 것이다.

내가 다니는 길이 편하다고 남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빙판이 있을 거란 예상을 못하는 바람에 애를 먹은 나와 달리

어디쯤에 얼음이 있을거라 아이젠을 준비한 사람도 있고

내가 늘 다니는 길이 나는 편하지만

처음 걷는 사람은  매우 힘들어도 한다.

어떻게 하면 겁없이 처음 가는 길도 늘 다니던 길처럼

편하게 안심하고 걸을 수 있을까.

남편의 정년과 그 후의 일이 구체적이지 못한 나는

이것이 숙제이다.

이제부타라도 다른 길을 걷는 연습을 해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산길이 되든 인생길이 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