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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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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정말


BY 모퉁이 2009-07-18

며칠 일을 했다.

비가 올듯 후텁지근한 날씨라 사무실 문을 열어놓고 있었는데

불쑥 낯선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콧잔등에 땀을 송송 매단 여자아이가  내 눈과 마주치자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아주 느린 말투로 찬찬히

할머니와 동생과 살고 있는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나왔다며

좀 도와달라고 했다.

가끔 껌이나 자잘한 물건을 팔러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럴 때마다 다 팔아줄 수 없어 돌려보내거나 얼마를 드려 보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어린 사람은 처음이라 다들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말에 사람들은 난처해 하는 것 같고

더 이상 그 아이의 말에 귀담지 않고 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는 자꾸  내 눈을 따라 다니며 말을 걸었다.

난처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아이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들으니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쉽게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 이제는 내 눈이 아니라 몸을 따라다녔다.

 가방에서  치솔,손수건,휴대폰 고리 등을 꺼내더니 사라며 거의 억지를 썼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꼭 필요한 물건이라서 팔아주기보다

어쩔수 없이 사거나 물건은 받지 않고 돈만 얼마 주는 경우가 있다.

어제는 어린 아이라 안스럽기도 하고

지갑에는 돈도 어중간히 있기도 했지만

만 원짜리를 주기는 형편상이나 분위기상 아닌 것 같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접어서 살짝 손에 쥐어주었더니

순간 여자아이가 내 몸을 밀치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온순하고 느릿하던 말투에서

순간 눈동자와 표정이 무섭게 변해서섬찟했다.

내가 저 물건에 손을 댄 것도 아니고

뭐라고 나무라지도 않았고, 억지로 내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는지.

멍하게 선 내게 물건을 들이밀며 고르라는 자세다.

물건은 필요한 게 없고 지금은 일을 하는 중이니 오늘은 그만 가보라고 했지만

물건을 자꾸 들이밀길래  돈을 받았으니 뭘 하나 주고 싶다고 안기는 줄 알았다.

여전히 그 느린 말투로  하나 사라는 말을 듣고서는

그때서야  사태파악을 짐작하고는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물건을 사지 않고 돈을 준 것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그렇게 거친 몸짓으로 대든 것이 아닌가 싶어

내가 아가씨한테 그냥 돈을 줘서 마음 상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지금 필요한 것이 없고 필요치 않은 것을 산다는 것도 그렇고

지금은 돈이 모자라서 물건을 살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도

쉽게 물러갈 눈치가 아니라 이거 정말 안 좋은 일 생기면 어쩌나 싶어 겁이 다 났다.

그 아이가 내게 같은 말을 하는 동안

나도 같은 말을 또하고는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한참을 실갱이를 해야했다.

"날씨도 흐린데 마음까지 흐리네."

"딱히 살 건 없고 그냥 보내기 뭐해서 자기처럼 그러는 사람 많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어."

 

뭐가 잘났다고, 모른체 하고 그냥 보내던가

도와줄려면 화끈하게 원하는 물건 확 팔아주어

발걸음 가볍게 보내던가 할 것이지

이도저도 못하면서 어줍잖은 짓으로 마음만 서로 다쳤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 아이는 장사를 하러 왔지 구걸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

나의 짧은 판단으로 그 아이의 자존심을 밟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냥주듯 던져준 게 아닌데 아이는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차라리,,차라리,, 나도 침묵할 걸.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것을 봤어도 못 본 척할 걸.

그 눈을 외면할 걸.

화장실에나 갔다 올 걸.

물이나 마시러 갈 걸.

차라리 전화라도 와주지.

그 아이가 돌아간 뒤  눈이 흐려지고 속이 뜨거워

한동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나로 인해 마음 상했다면 정말정말 미안하고

적선하듯 대한 마음은 추호도 없었음에도

받는 사람은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내 어리석고 짧은 미련이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천 원짜리 몇 장으로 내 가슴이 시험 당한 것 같아 참으로 부끄럽던 날이었다.

모자란 생각으로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우매한 죄를 지은 나를 나무라듯

오후가 되자 장대비가 몰아쳤다.

길가다가 만났다면 빗물을 빙자해 엉엉 울고 싶어졌다.

퇴근시간이 되자 더 비는 더 거칠게 내렸고

시간맞춰 퇴근한 남편이 정중(?)하게도 데리러 와 주어

울음은 참았지만 지금도 그 아이의 섬뜩한 눈빛이 생각나

가슴 한 쪽이 묵직하다.

 

살면서 내 뜻과 상관없이 남에게 아픔을 준 적은 없는지

악의없이 던진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린 적은 없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