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한참을 울고서야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받는다.
"아줌마! 저 혁인데요. 엄마는 지금 검사중입니다.
마치면 연락 드리라 할께요."
녀석. 군대 갔다 오더니 어른이 되었네. 저 아빤줄 알았네.
대수술을 받았던 친구의 정기검진이 있을 즈음인데 당최 연락이 없어
오늘은 작정을 하고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들과 함께 와서는 검사 중이라 한다.
살짝 서운하고 싶은데 홀쭉해진 목소리로 사정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는 검사가 많아 기운이 없고 시간상 만나지 못하고 갈 것 같다며
다음 검사일을 약속하잔다.
"오늘은 그냥 갈께"
늘 타고 다니던 KTX도 안타고 고속버스를 이용하겠단다.
본인은 할인혜택이 있지만 아들 교통비가 비싸서 버스를 타고 왔단다.
언제는 놀이공원도 가고 남대문상가에서 쇼핑도 하고 갔었는데
교통비 아껴야된다는 말이 괜히 찌릿했다.
터미널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한숨에 달려가지 못한 나도 아둔하다.
다음 검사일은 아마 철쭉이 만개할 계절일텐데
그땐 오늘의 우울한 목소리 대신 활짝 핀 철쭉마냥 기쁜 웃음으로 만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남편 회사의 경리부장이요 비서요
부사장 역할을 하는 친구가,가끔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생기면
느닷없이 도움을 청할 때가 있었다.
월급쟁이 아내가 목돈을 쟁여놓고 살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오죽 급했으면 내게까지 부탁을 했을까.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또 되는대로 몇번 급한불 끄기에 거든적이 있었다.
고맙다며 미안타며 성의니 받아달라며 얼마를 얹어 보낼 때는
우리사이가 이렇게 계산적이었나 싶어 서운키도 했지만
그래야만 저 마음이 편하다고 계좌에 넣어 보내는 마음을 받아들였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비자금이랄 것도 없이 주섬주섬 몇 푼 있던 것을 친구네 불끄기에 보탰다.
일을 하는 친구라 나보다 친구가 시간날 때 먼저 전화하는 편이어서
나는 전화보다 문자로 안부를 묻곤 했다.
답문이 없어도 머리를 감는 중이거나, 운전 중이거나, 일이 바쁘거니 했다.
그러다 한참만에 전화를 하니, 참으로 황당한 말을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면목이 없어서 전화도 못하고 문자 답도 못 보냈단다.
시답잖은 소리 한다며 역정을 섞었지만 친구는 미안타는 말만 되한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친구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고는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이 주저해졌다.
돈이란 놈이 둘 사이에 낮은 장벽을 치고 있는 것인가.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추우면 춥다고, 바람이 고우면 곱다고,
손가락을 다쳤다고, 기분이 더럽다고, 새해엔 건강하라고
문자로 보내는 안부가 자꾸 쌓여만 가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가 불경기라고 한다.
중소기업 하청업체는 더 할 것라는 경제신문을 읽지 않아도
친구네 사업도 불황을 업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그간 몇번은 속엣말을 했었을텐데 안부전화조차 뜸하니
친구란 과연 어느 선에서 부를수 있는 이름인지 씁쓸하다.
평소대로라면 오늘같은 날 올라오기 전에 미리 전화하여
병원 로비에서 혹은 터미널 식당에서라도 격없는 입담을 나누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내고 왔을텐데
빈둥댄 시간이 자꾸 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