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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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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아직 먼 문화생활


BY 모퉁이 2006-04-29

연극 티켓이 두 장 생겼다며 같이 가잔다.

몸만 나오면 된다는 말에 약속을 했다.

요즘 연극계가 초대권 남발로 재정이 바닥이라는데

내가 그에 일조를 하는 격이지만

사실,공짜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 몇 있을까.

 

솔직히 나는 공짜든 아니든 연극을 관람한 적이 없다.

마당 놀이는 한 번은 초대권이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친구를 건내줬고

한 번은 돈 내고 표 사서 구경했고

악극도 한 번 봤는데 역시 초대권으로 갔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연극 구경을 하게 되었다.

 

저녁에 문화 생활을 하러 갈 것이니

저녁은 각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온 식구들에게 고했다.

아이들은 저녁 약속이 있으니 밥 걱정 말라고 그러고

남편은 챙겨 놓고 가면 먹는 일은 혼자 하겠다고 했다.

 

시간은 저녁 7시 30분,

 좌석은 가서 배정 받으면 되니

먼저 가서 처리 해 놓을테니 7시 10분까지 오란다.

차려 놓은 밥상에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겠다.

일찌거니 저녁을 해서 먹고 남편 밥상을 봐서

밥상보로 덮어 놓고 얌전하게 메모까지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동네에서 제일 말 많은 여자를 통로 입구에서 만났다.

저녁 밥 지을 시간인데 뭔 일로 어슬렁 거리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팔짱을 낀 폼이 바빠 보이지도 않고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도 않은 것이

그야말로 슬슬 콧바람 쐬러 나온 폼이다.

어디 가냐고 묻지 않을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답을 말 할 나도 아니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자 머리 모양이 예쁘다며

괜히 친한 척 밉지 않은 말을 내 뒤꼭지에 대고 주절거린다.

말은 많지만 듣기 싫은 말이 아니라서 봐 주기로 하고

다음 대답은 생략해 버렸다.

 

관리실 앞을 지나자 관리인 아저씨께서 또 말을 거신다.

다 저녁에 집을 나가는 내가 의아한 모양이다.

시장을 가는 것 같지는 않고,학교 운동장에 뜀박질 하러 가는 것은

더 아닌 것 같아 보인다는 눈으로 쳐다보신다.

혼자 하는 저녁 외출은 이렇듯 자유롭지 못하다.

 

약속 장소에 10여분 일찍 도착을 했다.

대학로의 저녁 7시는 무척 붐볐다.

굳이 시간을 기다릴 것 없어 전화를 걸었다.

'언니~잠깐 기다려요.문제가 좀 생겼어요.가서 얘기할게~'

'이게 뭔 소리여?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이여.

연극 보는데 시험을 치르는겨? 어려운 문젠겨?'

 

연극표 두 장을 얻었다고 했다.

초대권으로 알았고 예약을 할 때도 그렇게 알았단다.

좌석 배정을 받으러 갔더니 30% 할인권이라고 하더란다.

25000원 짜리 연극을 17500원에 볼 수 있는 표라는 것이다.

문제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생각이 달라졌다.

대학로에는 연극을 하는 소극장이 많다.

골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 극장의 그 연극을 봐야 될 이유가 없지 않냐는

아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초대권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즐겨 보려는 문화 생활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어떻게 할겨? 나온 김에 한 편 보고 갈까?난 연극 한 번도 못 봤는데..'

대부분 연극 시간이 저녁엔 7시 30분인데

다른 극을 알아볼 시간도 선택할 시간도 여유롭지 않았다.

'공짜라는 헛물을 켠 값을 치뤘다 생각하고

앞으로는 초대권이 아닌 정식권(?)을 사서

우리도 멋진 연극에 취해 보자구.'

 

연극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하루가 부풀어 있었던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였었나 보다.

전에 없이 화사한 화장까지 하고 잘 신지도 않던 구두를 꺼내신고

딸래미 가방을 몰래 챙겨 들고 나간 내 모습이나

입술에 반짝이 섞인 립스틱을 곱게 칠한 그녀의 모습도

꽤나 신경 쓰고 나온 티가 역력했으니까...

 

'다음에 기회 되면...'

쉽지 않을 것 같은 약속을 뒤로 하고 허망한 발길을 돌려

각각 다른 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교통카드를 갖다 대니  [환승입니다] 한다.

설레이고 엇갈리는데 걸린 시간이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관리실 아저씨가 교대 근무에 들어가셨는지

나갈 때 앉아 계시던 분이 아니었다.

목례를 하고 손 뻗으니 닿는 곳에 탐스러이 달린

라일락 한 덩어리를 코에 갖다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코 속을 후벼 파는 듯한 향내가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열쇠 구멍을 비틀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려놓은 밥상이 그대로 였다.

남편은 탁구 동아리에서 한참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모양이다.

옷을 벗기 전에 거울 앞에 서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방을 얼른 제 자리에 비워 놓고

푸덕푸덕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했다.

 

'어~일찍 왔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

'그렇다고 그냥 왔냐?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오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아둔한 여자.

말은 쉽게 하지만 헛탕치고 돌아온 여자가 속상해 보였나.

'그냥 오지 않으면 어쩌냐.

저녁도 먹고 갔지,기분은 꾸리하지,공짜 너무 좋아한 탓이지 뭐..'

 

아이들이 들어왔다.

'엄마 연극 잘 봤어?'

'느그 엄마 그냥 왔단다.'

'왜에?'

'이러구 저러구 그러잖냐..그래서 그냥 왔지.'

아이구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쩌누.. 하는 눈이다.

'저녁이라도 맛있는 거 먹고...다른거라도 보고 오지 그랬어.'

 

그래.

다른 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그 고상한 문화생활,

내게는 아직 먼 생활인가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