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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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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노는 여자


BY 모퉁이 2005-04-11

차가운 계단 밟는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더니

그 소리가 우리집 앞에서 멈추는 듯 했다.

벨 대신 똑똑 노크소리로 주인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어

조그만 유리문구멍으로 보니 4층에 사는 여자였다.

[이 시간에 왠 일이유?]

 

그녀는 직장에 다니는 여자.

나는 전업주부다.

 

외출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일찍 들어오는 길이라 했다.

배가 부르다면서, 끓여 내놓은 차를 식히고 앉아서

바깥 이야기를 생전 듣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으로 뵈는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방금 보고 온 이야기로 정신을 빼놓는다.

 

네네..세상에...오마나...요즘 다 그렇지...

대충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아니지..다 그런가..사람 나름아니겠수..좋은 사람들도 많아..

아닌건 아니라고도 했다.

 

커텐이나 빨아야 겠다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끙~하며 일으켰다.

따각대며 4층으로 올라갔다.

 

모임이 있다고 남편도 늦고 아이들도 늦고 해서

혼자 저녁을 먹어 치우고 막 앞치마를 푸는데 전화가 왔다.

자기네 남편도 늦는다며 집에 와서 차나 한 잔 하란다.

안 가고 싶어 아이들 핑계를 댔다.

다 큰 아이들 챙겨먹겠지 너무 품 안에서 키우지 마라며 자꾸 오란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이웃이 사진 구경 시켜준다고 와 있었다.

벌써 부른 모양이다.

사진 속에 여자가 입은 셔츠가 자기가 준 것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사진 주인공이 괜히 머쓱한지 몸을 비튼다.

 

거실에 무겁게 걸려있는 커텐에 눈이 갔다.

[아까 커텐 빤다고 하지 않았어요?]

 

남편에게 화살이 꽂혔다.

퇴근 일찍해서 와이셔츠 두개 빨라고 했는데 퇴근이 늦다고 한다.

[와이셔츠를 남편한테 맡겨요?커텐도 남편한테 빨라고 할 참이었어요?

세탁기에 넣어서 돌려도 될 것 같은데..]

커텐을 떼줘야 세탁기에 넣던지 발로 밟던지 할 게 아니냐고 한다.

 

[남편도 바쁠텐데 남편에게 그런 일도 시키나벼.

커텐이 높게 달린 것도 아니구만 의자 놓고 떼면 되겠구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받는 말이

[집에 노는 여자하고 같아?]

 

아...

그렇구나.나는 집에 노는 여자고

자기는 일하는 여자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네.

분명 저녁 약속이었는데 갑자기 낮으로 바꾸어 버렸다.

낮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된다고 했더니

'집에 노는 사람'이라 아무때나 잡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고 했었다.**

 

두번을 [집에 노는 여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집에서 노는 여자의 자존심이 물고무마 장화에 짓밟힌 느낌이랄까.

 

전업주부지만 나태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내 일을 찾아서 취미생활도 하고

가정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남편에게 셔츠 빨라고 명령하는

그딴짓(?)은 하지 않는다.

 

[있지..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하나씩의 자를 갖고 있는 것 같어.

그 자로 모든 것을 재는 버릇이 있어.

그런데 말이지..내가 갖고 있는 자가 휘었는지 눈금이 틀린지는

나만 모를수가 있어.그 틀린 자로 사물을 재니 어째 바르다고 할 수 있겠나.

우린 어쩌면 모두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

나 역시 비뚤어진 자로 이렇게 재단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 그만 내려갈래...]

 

4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무척 길고 무거웠던 '집에 노는 여자'의 어느날 저녁.

 

 

 

 

 

2004-12-06 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