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일어난 남편이 태극기를 내다 달았다. 국기봉이 짧아서 까만 리본을 단 태극기를...
해마다 남편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간다. 군대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의 묘역을 찾는다. 두 해 전에는 같이 갔었다가 선배님의 미망인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미망인에게서 지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남편은 내가 결혼하기 전에 군대에서 훈련중 돌아가셨고 당시 꼬마(5살, 3살)였던 아들과 딸이 너무도 잘 자라주어 아들은 대기업에 다니고 딸은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간의 고생이 지금 관절염이 되어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자식들만 봐도 아픈건 모르고 그저 흐뭇하기만 하신단다. 자식들은 이제 일 놓고 구경다니고 운동이나 하면서 쉬라고 하여도 하던 식당일은 할 수 있을 때 까지 하겠다고 하였다.
사람은 환경에 부딪치면 변하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 그 분도 처음부터 억척이지는 않았다 한다. 남편 월급에 어린 자식 키우며 살림만 하던 사람이 어느날 남편이 커다란 빈 자리 남겨놓고 훌쩍 가벼렸으니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진 느낌 왜 없었을까. 그렇다고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혼자 삭인 울음과 깨문 입술에 핏멍이 들었지만 동그랗게 눈뜨고 쳐다보는 어린 자식들 눈망울이 너무도 커서 너무도 예뻐서 그 눈에 눈물 담기 싫었다고 했다.
분식집부터 시작해서 크지는 않지만 지금도 식당일을 하시지만 자식들 반듯하게 커가는 보람 하나로 위안을 삼고 희망을 갖고 이십 년을 넘게 버티고 왔다고 했다. 먼저 가신 남편의 친구분들과 그의 아내들이 많은 힘을 주었고 친자매 남매 못지 않게 두터운 우애를 자랑하는 시누님과 시동생들. 그들의 진정한 사랑이 지금껏 미망인의 버팀목이었다고 하셨다. 그날도 남편 친구분들과 시댁 가족들이 다 오셨다.
20대 젊은 미망인에서 50줄을 넘긴 후덕한 아줌마 옆에 잘 생기고 듬직한 아들과 착하고 고운 딸이 양산을 받쳐들고 있던 모습이 생각나는 아침. 베란다 밖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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