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공식적으로 목욕탕 가는 날은...
설날과 추석 전날 지짐이 부치고 난 엄마의 기름내 나는 머리수건을 벗어 예쁜이 비누 한장 넣고 까칠한 돌멩이 하나 담은 아껴놓은 세숫대야를 옆구리에 끼고 졸랑졸랑 엄마 손잡고 '나 목욕간다~'하고 소문이라도 내고플 정도로 예전엔 목욕탕 가는 길도 자랑스러웠다.
아들이 없는 우리집은 아버지 혼자 간간히 목욕탕에 가시곤 했는데 수건에 비누 하나 돌돌 말아 쥔 것이 전부였다. 요즘도 남자들은 빈몸으로 가도 목욕이 가능하지만 여자들은 챙겨야 하는 물건들이 왜그리 많은지 가방이나 대야에 하나 가득이다.
동네에 유일한 목욕탕은 초딩동창넘의 집이었다. 얼굴은 맨지리 하게 생겼지만 목욕탕집 아들의 겨울손도 홈패치기(자치기)나 구슬치기 할 때 보면 터져서 피가 나오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는 목욕탕에만 다녀오면 까칠하고 시커먼 손이 금방이라도 윤이나고 맨질할줄 알았지만 워낙이 눌어붙은 때는 목욕을 하고 와도 팅팅 불어 숭기숭기 때가 일어나서 허옇기만 할뿐 하루만에 검은손이 흰손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가마솥에 고구마 삶고 난 뒤 물을 부었다가 아궁이 남은 불에 데워진 뜨신물을 찌그러진 세숫대야에 담아 터서 피가 나는 손을 담굴라치면 쓰리고 따가워서 눈을 찔끈 감고 몇초동안 그 아픔을 참아내야 했었다.
그리고는 아껴둔 엄마의 동동구리무를 눈꼽만큼 찍어다가 바르면 분내나는 구리무가 손에 스며들어 자다가 손을 만져보면 그때는 비단결이 이리 고운가도 싶었다. 그러나 그 손이 며칠이나 갔을까. 장갑도 없이 비료포대들고 미끄럼 타러 가야하고 남의집 지붕을 넘길만큼 세게 쳐대는 자치기도 해야되고 바지 주머니가 흘러내릴만큼 주머니를 가득채워야 성이 찬 구슬치기도 해야했으니 말이다.
설날이나 추석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뽀골뽀골 불파마도 한번 해야하고 새끼들 단체로 목욕탕에 가야하는 것도 그때는 거금드는 일이었다.
대목아래 외상값 갚는 일만큼 힘든, 목욕탕 가는 일도 힘들었던 그 시절엔 목욕탕 가는 것도 자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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