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언니 둘이 더있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내 기억에는 지금 언니말고는 둘을 본 기억이 없다. 딸만 일곱을 낳은 엄마는 둘을 가슴에 묻었기에 나는 졸지에 다섯번 째 딸에서 세째딸로 변신하는 운명이 되었다.
몇살이나 되었을까. 취학전 이었으니 아마 예닐곱살 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볕좋은 날이었는데 오른쪽 목 부위가 몹시 아팠고 열이 끓어 종일 칭얼대었던 모양이다. 아래로 세살 터울인 동생도 만만찮이 손이 갈 때 였는데 누가 막내인지 어리광과 칭얼댐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를 데리고 드물게 있던 시내 의원대신 동네에서 품파는 의사에게 갔었다 한다.병명은 '볼거리'였고 속에서 곪을 대로 곪았는지 나는 기어이 칼을 대는 수술을 받아야 했었다. 면허가 있는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네사람 아프면 대개 그 집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처방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몇일을 엄마 등에 엎혀서 동네 하꼬방같은 집 어두침침한 방에 가서 들어 누우면 연장통 같은 가방에서 쇠소리가 나는 연장(?)을 꺼내어 덜거럭 거리는 소리를 듣다보면 빨간약을 바르고 길다란 거즈를 어디까지 쑤셔넣는지 아파 눈물을 찔끔댈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꼭 잡은 엄마손이 너무 따뜻해서 나오는 눈물을 엄마손등에 훔치고는 모질게도 입술을 깨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넓다란 거즈에 반창고로 봉하고는 끝이었는데 용하게 잘 참아준 댓가로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식빵처럼 생긴 술빵(우린 소빵이라 했음) 한 조각과 오렌지색 색소를 첨가한 삼각형 비닐봉지에 든 음료를 한 봉지 내 손에 쥐어주었다.엄마 등에 얼굴을 묻고 통증을 참느라 얼른 그 빵과 오렌지쥬스를 먹지는 못했지만 양손에 들려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동생이나 언니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내 아픔을 감내하며 이기고 참아낸 보상으로 받은 선물이었기에 누구와도 나누어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동생이 있어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눔을 배우고 알았던 어린시절이었다.
물질적으로 넉넉치 못하였음에 우리는 요즘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었고 형제간의 우애도 더 돈독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발병한 볼거리 때문에 내 오른쪽 귀밑에는 작은 흉이 남아있다. 머리로 덮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세수하다 한번씩 쓰다듬어 보는 내 몸 한 곳에 유일한 칼자국이다.
몇일 볼거리로 고생은 하였지만 그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 지금 내게 이런 글거리가 되어 지면을 빌려 한가한 오후 한 낮을 지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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