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약주를 참 좋아하셨다. 기분좋아 한 잔,그렇지 못 해 한 잔. 그때는 왜 그렇게들 술을 드셨는지 모르겠다. 술을 드시고 온 날이면 으례히 엄마목소리 커졌고 두 분은 다투시기도 하였지만 이내 아버지 코고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어두운 방에서 양말짝을 깁거나,작은 트랜지스트 라디오에서 연속극을 듣으며 그 날의 껍데기같은 피로를 푸시는거 같았다.
아버지는 주로 막걸리를 드신 것 같았다. 막걸리 냄새가 역하면 홍시냄새가 났었다. 내 친구는 아버지의 홍시냄새가 좋았다고 회상(?)을 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감식초 냄새같기도 하고 아무튼 싫었다. 그런 아버지께서 간혹 우리들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딸만 다섯이나 되는 집이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운데였다. 위로 언니둘은 크다고 안 시키고,아래로 동생 둘은 어리다고 안 시키고 결국 심부름은 내 차지였는데,그때 막걸리를 파는 집은 여러가지 부식을 파는 집이었다. 심부름을 가면 같은반 남자아이를 잘 만나기도 하여서 막걸리 심부름은 정말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였다.
저만치 가는 시늉을 내다가 동생을 불러다가 다녀오라고 시키고, 남의집 처마밑에 쭈구리고 앉았다가 되받아 들고 가곤 했었다. 이런 나의 비리는 오래지 않아 들통이 나 버리고,나는 한 번 되게 혼나고 난 뒤 그로부터는 막걸리 심부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이미 막걸리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막걸리 주전자가 찰랑거리는 바람에 바짓가랭이가 젖을 것 같아 한모금 쪽 빨아먹고, 무거워 쉬는 걸음에서 한모금 빨아먹고, 달작지근한 그 맛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한모금 먹고.. 그러다가 배운 맛이어서 그럴까. 지금도 소주는 못 마셔도 막걸리는 한 잔 정도 마신다.
아버지께서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술 마시는 사위는 보지 않겠노라시던 울엄마. 다섯 사위 성씨는 모두 다르지만 술 좋아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아버지 큰사위만 아시지 다른 네 사위는 모르신다. 큰딸 하나 여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 기일이면 정종대신 막걸리를 올린다. 마지막 음복을 하면서 참석한 딸들은 한마디씩 한다.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참 많이 했었는데.... 동생이 그런다. 언니는 심부름도 안하고 맨날 대신 시키기만 했다고.. 그래서 싫었다고..
막걸리 집에는 바닥에 항아리를 묻어두었었다. 지금 생각하니 김칫독 묻듯이 막걸리 항아리를 묻어두었던 것 같다. 나무 솥뚜껑같은 것을 열면 쌀뜨물같은 막걸리가 가득하였고 어떤 날은 엎드려 퍼 담아야 될 정도로 속이 비어있기도 하였다.
약수터에 걸린 국자모양의 바가지로 휘휘 두어번 저어서 철철 흘리며 퍼 담은 막걸리는 찌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겨져서 김치쪼가리와 함께 울아버지의 컬컬한 목을 축여주는 그 시절의 청량제였었다.
오늘같이 구질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정구지 지짐이 부쳐서 아버지와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크~세상근심 다 잊어버리고 입가에 막걸리 자국 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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