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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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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못났을까...


BY 모퉁이 2005-04-08

김장김치가 몇조각 남긴 했지만 맛이라곤 당기지가 않는다.

김치를 좀 담글까 마음을 먹었는데 아침마다 들르는 야채아저씨가

오늘은 들어오시지도 않고,야채가게 전화를 해 봐도 받지를 않는다.

여름휴가갔나 보다.

 

계획을 접어두고 운동도 할 겸 아는 얼굴도 볼 겸 집을 나섰다.

날씨가 흐리긴 했어도 비는 오후부터 올 것 같다는 단지 내 예감 하나믿고

우산은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고 나왔는데 아뿔싸..

볼링을 네게임 치고 돌아갈 시간인데 비가 온다.

오늘은 뭔가 꼬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우산을 갖고 오지는 않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태연하다.

차를 갖고 나왔단다.

아...나는 장농면허 9년차에 자동차 열쇠 꽂아본지 몇 년 되었는지

아마 열쇠 꽂는 자리도 잊어버렸을 것 같다.

 

점심을 먹고 가잔다.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어차피 버린 몸 될 터인데 그래 점심이나 먹고 가자.

먼저 말을 꺼낸 이가 점심값을 지불하고 가는 길에 좀 둘러가더라도

나를 데려다 주고 가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가는 사이에 얼른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만데..엄마 친구 한 명이 갈거여.얼른 대충 집 좀 정리 해 놔~"

 

집이라곤 작아서 조금만 늘어놔도 가득찬 집 같아서

아침에 펼쳐놓고 나온 신문이며,현관에 늘어진 슬리퍼하며 모르긴 해도

아마 침대에 이불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리라 짐작이 간다.

갑자기 친구가 집에 가게 되리란 생각도 못했고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아서 대충 아침 설겆이만 해 놓고

집을 나온터라 이제사 신경이 쓰인다.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않고,크게 수다스럽지 않다고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나를

집에서 살림만 착실히 하고 사는 여자로 찍혀 있는데,왠걸..우리집에 와보고는

허참..사람 겉만 봐서는 모를 일일세..하지 않을까..?^^

 

내 나이 마흔하고 다섯.

이 나이쯤이면 보통의 사람들은 아파트 삼십평형대는 기본이고

어느정도 구색 갖춘 집에서 나름대로 우아(?)한 생활을 하리라.

그런데 나는 아직 아니다.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노라 한 이 친구도 벌써 중형차에 나를 태워서는

빗길을 쓱쓱 빠져나가는 솜씨가 제법 유연한데,나는 이게 뭐람...

 

에어콘대신 선풍기가 길다란 줄을 연결해서 방을 가로질러 널려있고

어제 만들어 먹었던 빵조각은 밥상보에 덮힌채 숨을 감추고 있었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스텐주전자가 가스렌지 위에 놓여져 있고

아침에 벗어 빨지 않은 세탁물이 담긴 세탁기는 입을 헤벌레 벌린 채

뜨악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집 모양새에 나는 그만 얼굴이 달아오른다.

 

최소한 10년 이상씩은 됨직한 가재도구들로 나열된 안방과 아이들 방,그리고

거실 한 쪽에 놓여진 이 구형 컴퓨터 옆에는 오단짜리 서랍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가구 배치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거실을 채우고 있는 모양이

다녀간 친구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그냥 우산 하나 사서 쓰고 올걸 그랬나..

괜히 집까지 바래다 주고 커피 한 잔 하고 가라 그랬나..

 

사람은 우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늠하는 세상 아니던가.

비록 내가 지금 가진 것은 없으나 불행하다고 생각진 않았는데

오늘 나는 괜히 주눅이 들어버린다.

많은 돈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두 아이 모두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주고 있고

내 믿음이겠지만 건실하고 가정적인 남편이 있어서 언제든지 기댈 수 있어

편하고 듬직하였기에 투정도 부릴 수 있었는데..오늘은 그것도 약이 되어주지 않는다.

 

급한 전화를 받고 커피 한 잔을 숭늉처럼 마시고 일어서는 사람을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빗속으로 내 보냈다.

현관 앞에서 배웅을 하고는 신발장 정리부터 싱크대 정리까지 다시 했다.

작지만 아늑한 내 보금자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밀대 걸레로 밀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전화벨이 울리면 세번 이상 울리지 않아도 되고,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것만 없는 내 집인데 왜 내가 잠시 주눅이 들었을까.

 

여보,얘들아~!

우리 서로 사랑하며 이대로 행복하다 여기며 살자.

돈이란 최소한의 자존심만 세울 정도만 있으면 되는거 아니냐던

어떤 사람의 말이 오늘 내게 명언으로 각인된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란,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면 되고

하고 싶은거 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거 살 수 있는 여건만 되면 되고

그러다가 간혹은 단돈 1000원이라도 남을 위해 흔쾌히 내 놓을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된다고 하였다.

 

돈 많고 집 크고 호위호식 하며 사는게 전부는 아닐텐데

그걸 알면서도 내심 부럽고 따라 하고 싶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이 환경도 그리 열악하지도 않는데

왜 내가 못난 생각에 얼굴을 붉혔을까.

내 욕심과 내 못남에 반성문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는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2003-07-28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