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앞둔 시간 핸드폰이 깜빡인다.
어찌 그리 귀신인겨, 딱 2분전이구만..궁시렁거리며 받으니
잔뜩 힘을 실은 하이톤의 울집남자 목소리가 사무실이 쩡쩡 울리도록 쏟아져 나온다.
본능적으로 소리높이를 낮춤과 동시에
내 귀에서 저만치 떨어지게 하는 팔동작에 작은 짜증이 실린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게야..'
그도 그럴 것이 결혼 만 16년을 넘기다보니
목소리의 톤만으로도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상황을 짐작하게 되는데
이젠 그 상황의 성질까지도 훤히 꿰뚫을 정도로 이골이 났다고 하는게
더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아, 재성이가 들어왔다 카네..가가 갑자기 어데로 가겠노.
마 오늘 저녁 우리집에서 친구들이랑 저녁이나 좀하게 니가 준비좀 해도고
-갑자기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하라고..뭘 해야 하는데
-자갈치에 가서 회나 좀 떠오고 닭 한 두어 마리 사서 닭도리탕이나 좀 하고
고기 재워서 좀 굽고 하믄 안되것나
-헉^^ 그 많은 걸 우째 내가 다 하노..시간이 널린 것도 아니고..
-그카믄 고기는 내가 여서 재워놓은 거 사갈테니 니는 얼른 회떠서
야채랑 밥이랑 준비해놓고 우선 닭도리탕만 맛나게 해봐라 알았나?
-(작은 목소리로) 하는데 까정 해보께..
-어이, 왜 목소리가 다 기어들어가노, 이왕하는거 좀 속시원하게 해라 알긋나?
기세도 좋게 딸깍 전화가 끊어진다.
'아이고 저 화상. 내가 못살아요 못살아'
입이 댓발은 나오고 마음엔 삐죽삐죽 날카로운 모서리가 선다.
왔다갔다 하는 날씨 속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휘저으며
장바구니 준비를 못했으니 까만 봉다리봉다리 손가락이 끊어져라 그러쥐고
겨우 도착한 집에서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부엌은 부엌대로 힘에부친 시간을 달렸다.
그럭저럭 준비가 끝나갈 즈음 현관이 떠들썩해진다.
남편까지 도합 6명의 등치 큰 남자들이 신발도 벗기전부터
-보소, 보소 하느님들 도착이요~~를 기세좋게도 외친다.
속이야 우그러지던 문들어지던
앞치마에 손닦으며 뱅그르 웃음으로 달려나가는 나,
완전 백단 여우다.
불과 5달여 뒤면 지천명을 껴안을 남자들의 거뭇한 웃음이
거실 가득 마냥 허허롭게 맴돈다.
저 웃음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그대로
저렇듯 매양 같이 갈수만 있다면..갑자기 울컥해지면서
저녁 내내 땀벅벅으로 동동거리던 심사가 하냥 누그러진다.
사람은 더 없이 좋은데
누군가 그 넉넉한 인품을 시기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이혼을 겪더니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일마다 몇 번의 실패만 안고
결국은 막다른 끝에서 말레이지아행을 선택한 남편의 친구.
그 친구가 진행중인 사업의 연결고리 해결차
잠시 다니러 들어오자
모일 기회만 엿보던 남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이유가 제공된 터.
친구가 급히 출국이 정해지는 바람에
안그래도 밥한끼 못해 주고 보냈던 섭섭함이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긴 여운으로 남았었기에
같이 술 한잔 받아들며 내 마음도 어느덧 함께 어우러졌다.
-아, 술맛 좋고 음식 맛 좋고~~!
연방 내뱉는 말이 인사성이건 아부성이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술잔이 날라다니는가 싶게 빠른 속도로 비워져 가는 술병들.
급하게 살아낸 시간들이 모처럼 느긋해진 허리띠를 달래가며
눈치보고 조아리느라 제대로 비워내지 못했던 술잔들을
비로소 마음놓고 돌리는 모습들이 짜안하다.
그 나이에 어디가서 그만큼 호기들을 부려대겠는가.
사회에서 치이고 가정에서 치이고 잘난 사람들에 치이고
여기저기 부딪혀 생채기 나고 긁힌 마음들이
어디엔들 저렇듯 편안히 퍼질러 앉을 틈이 있었을까.
다들 얼큰해져 조금씩 잇새로 붉콰하게 빠지는 발음들을 경쟁할 때
슬그머니 된장찌개 준비를 해서 올려 놓았다.
배가 불러 밥은 못먹겠다던 남자들이
한 술만 떠보라는 울집남자의 강권에 맛을 보더니
딱 시골맛이라며 너도나도 밥 한그릇씩 또 다시 뚝딱이다.
말레이지아에서 들어온 친구가
고향집에 온 듯하다며 거의 흐느끼듯 울집 남자에게 말한다.
-야, 이새꺄,, 니 참말로 고맙데이. 니 정말 좋은 놈이다.
그라고 니 처 복 정말 많은 놈이다. 알긋나, 잘해라 임먀 새꺄
-알긋다 이새캬, 니 그런 말좀 고마해라 새캬. 내는 평소에 잘한다 아이가
내가 니같은 줄 아나 새캬, 내 사실은 니땜에 얼마나 맴이 아픈줄 아나 새캬,
흐느적 흐느적 상위에 엎어질 듯 말 듯
끝까지 술병을 껴안은 울집 남자 목소리도 물컹물컹하다.
-맞다 맞어. 자자 건배다 ,건배~~!!
온 밤을 휘젓던 남자들의 자리가 새벽2를 넘겨서야 끝이 났다.
이미 먼저 취했던 남자들이 술에서 깰 시간에
각자의 집에서 달려온 몇 번 째의 독촉을 안고
얼음물 한 잔씩 들이켜고 다들 현관문을 나선다.
배웅을 하며 경비실 앞에서 얌마 쟘마 이새캬 저새캬 또 한 번 왁자지껄.
쥐죽은 듯 조용한 아파트가 화들짝 깨나는 듯 싶어 조바심이 나지만
오죽하면,...어쩌다 한 번 인데... 싶어 내 염려는 꿀꺽 삼킨다.
마지막 가던 사람이 인사를 하는 내게 은근히 다가와
어깨를 안듯 하며 앞치마 주머니에 뭔가를 슬쩍 찔러 넣고 윙크를 하더니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저만치 휘적휘적 내쳐간다.
집으로 들어와 설겆이를 하는데 전화가 온다.
-제수씨, 그거 달리 이유가 있는 기 아니고 우리들 마음인기라요
사실 우리도 집에서 그느마 밥 한끼 따뜻하게 먹이고 싶지만
아들 시험이다 아프다 뭐다 하면서 다들 눈치를 주는기라요
우리가 이래 사요. 그래도 제수씨같은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그놈아한테 다같이 낯이 서는 기라요, 고맙고 감사한기라요
하얀 봉투안에 파란 종이가 여덟장이나 들어있다.
먼데서 들어온 친구를 제외한 남자들이
십시일반 주섬주섬 모은 마음이리라.
울먹울먹해서 울집 남자에게 보여주니
취한 와중에도 자신의 위신을 세워준 여자를 위해
비틀비틀 설겆이를 도와주던 남자가 불쑥 뱉는다.
-아이구, 미친 놈들..내가 몬산다, 몬살아..
이 돈은 니한테 준거니까 고마 니가 알아서 해라.
설겆이를 끝내고 거실을 훔치고 나니
어느덧 새벽 3시가 아침을 향해 조금씩 커튼을 젖히고 있다.
부지런한 새벽은 벌써 현관마다 우유를 나르느라 계단이 부산스럽다.
지천명의 우정으로 취한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실 한 켠에 모로 누워
깊고도 짧은 밤에 들었다.
-고맙데이..
잠결에 남자가 침과 함께 흘리는 말에 가슴이 출렁거린다.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아니 소중한 이 밤을 오늘만큼은 고스란히 안고 아침으로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