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들어 새로 시작한 한주의 시작.
월말에 밀쳐두었던 마감을 겨우 끝내고
이제서야 책상 앞에 놓인 작은 달력을 한 장 넘깁니다.
빽빽하게 채워져 한달을 살아낸 흔적들이 지워지고
또 다시 살아낼 기록들이 차례차례 제 작은 칸을 찾아 들어갑니다.
열심히 또박거리던 볼펜이 달력의 저 밑, 말미에서 딱 멈추어 섭니다.
7월 26일(음력 7/2), 아버님 가신지 4번 째 맞는 기일.
날씨는 후텁지근한데 가슴 깊은 곳이 싸아하니 서늘해집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요즘 많이 아프셔서 걱정이예요
빨리 나으셔서 백살도 더 사셔야 해요
제가 시집가는 거 꼭 보셔야 해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 할아버지의 손녀 희.
지금 갑자기 떠오른 딸애의 초등학교 3학년 때 편지글입니다.
담낭암이란 판정을 받았지만 연로하신지라 수술불가를 밝히던 의사선생님.
어떻게 좀 해달라는 가족들의 애원에
6개월 시한부를 들이대며 칼 잘못 대면 수술 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마지막을 편히 사시다 가시는 게 좋겠다고 퇴원을 종용하던 병원.
그런 처사에 대한 가족들의 오기였는지
아님, 아버님의 생에 대한 지극한 집착때문이었는지
퇴원 2년을 훌쩍 넘기고도 쟁쟁한 목소리로 식구들을 호령하시던 아버님.
처음의,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던 자식들의 정성은
어쩌면 그 6개월이라는 제한된 시간의 약속으로 하여
지금껏 후회되었던 날들을 보상받기 위한 호기로 작용했겠지만
1년을 넘기면서부터는 차츰차츰 무표정한 얼굴들을 하고는
마지 못한 의무감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주일에 한 번이 나중엔 어쩌다 한 번으로 줄어들었지요.
솔직히 며느리 된 입장에서 전 그게 더 편했습니다.
환자 한 분 모시는 거야 힘들어도 어짜피 내 몫이라 참고 견디겠는데
끝없이 밀려오는 손님 치레는 어찌나 힘이 들고 짜증스럽던지요.
돌아서면 손님 밥 해야 하고 돌아서면 차茶 내야 하고
헐레벌떡 시장 봐와야 하고 사 온 음식(죽) 절대로 안 드시는 아버님인지라
콩죽 같은 땀 뻘뻘 흘리며 팥죽, 흰죽, 잣죽, 녹두죽, 깨죽, 순서 돌려가며 쑤어대야지..달리 소금 간 할 필요도 없이 내 땀과 마음의 소금기로 절로 간이 되던 시간들.
그렇게 어느 덧 2년이란 세월을 무사히 넘긴 당신의 생신날.
다소 발길이 뜸했던 시누이들은 그동안의 무심을 무마하려는 듯
필요이상으로 온갖 요란을 떨고 눈물을 찔끔거리더군요.
머리맡에 한 보따리씩 내려놓는 선물들이
이미 거동이 불편한 아버님에겐 쓸데없는 장식품들이었겠고
거짓없는 손녀의 그 순수한 마음만이 놓을 수 없는 삶의 애착을
끝까지 버팅기게 해주는 힘이 되었던가 봅니다.
아침에 아버님 방에 걸레질을 하러 들어가면
자리끼를 놓은 경대 옆엔
평생 당신의 유일한 벗이었던 담배와 보이지 않게 깔린 한숨
그리고 또 하나
딸애가 연필로 꼭꼭 눌러 쓴 카드가 몇 달이 지나도
그 애의 동그란 웃음처럼 변함없이 놓여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카드가 자식들의 겉치레 생색을 후려치는 매질로 보이기도 하다가
또 가끔은 노환 시중에 힘들어 시시때때로 마음이 엇나가려는 며느리에 대한
호된 질책으로도 보여 슬그머니 치워버리고 싶은 때도 많았었는데
얄밉도록 고집스레 그 자리를 지켜내던 카드..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시큰거리는 마음이 되다가
어떨 때는 기특한 딸애가 마냥 이뻐보이다가
"느들은 요 작은 아보다 못한 기라"
하시며 싸잡아 야단이라도 맞을 때면
절로 딸애를 향해 눈과 마음이 찢어지기도 하다가..
매일같이 돋보기를 찾아 흐뭇하게 들여다 보던 그 카드는
6개월이란 시간을 더 살다 헤실헤실 헤어진 모습으로
아버님의 뒤를 따라갔지요.
당신의 삶을 불사르는 불길 속에 전 당연한 듯이
그 카드도 던져넣었지요. 아니, 어느 정도는 후련하게.
그리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태운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 게 기억인가 보네요.
오늘 달력을 채워넣다 불현듯 떠오른 딸애의 그 마음.
어쩔 수 없는 기억의 속성,
묻을 수록 더 깊이 살속으로 파고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