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줍는 밤
-운문산 자연휴양림을 다녀와서
한여름을 관통하는 휴일은 아침부터 열기가 후끈하다.
자고 있는 아이들을 채근해 미리 준비한 피서 도구들을 챙겨
아침밥도 생략하고 목적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운문산 자연 휴양림.
그리도 서둘러 도착했건만 휴가철이라 벌써 들어갈 자리가 없단다.
사람만 들어간다면야 입장료만 지불하고 입산을 하겠건만
문제는 들고 간 짐의 부피였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관리소 직원과 실랑이 하던 남편은
생각지도 않았던 산장을 덜컥 예약해 버리고는 신나게 손을 흔든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그 복잡한 피서철에도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여분의 방이
어디를 가나 비상책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한국만의 예로서 찾아볼 수 있는 풍습이겠지만
때문에 한 성격하는 남편은 적시에 기지를 발휘했을 테고―
하지만 주부의 입장인 나로서는 예상 밖의 지출에 입이 튀어나온다.
조금 불편해도 휴양림 밖 계곡쪽에서 놀다가면 되지 싶은데
남편은 아이들에게 여름낭만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은가 보다.
나무결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통나무 집의 분위기가
한여름처럼 시끄럽던 마음을 금새 잔잔하게 어루만져 준다.
탄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이들은 그제야 고픈배를 의식한 듯
스스로가 찾아서 짐을 부리느라 난리다.
늦은 아침겸 이른 점심 삼아 삼겹살 파티를 벌였다.
다들 상추와 깻잎 위에 고기를 얹어 입이 미어져라 맛나게들 먹는다.
문득 옛날 자식들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모습이 제일 보기좋다던
울엄마의 말이 생각나 새삼스럽게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엄마는 왜 밥 안먹고 우리들 얼굴만 자꾸 쳐다보는데. 빨리 묵으라”
아들녀석이 입을 우물거리며 툭 던지는 말에
“엄마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다 아이가. 그래도 쪼매만 묵으라”
딸아이가 너스레를 떨며 받아넘긴다.
“마, 귀신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 살이 좀 찌몬 어떻노.
내만 좋으면 되니까네 퍼뜩 마이 묵그라.”남편도 질세라 한 마디 거든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 내 속을 내어보일 필요는 없겠다 싶어 피식 웃어버렸다.
아들녀석은 혼자서 휴양림 내 야외물놀이장으로 달려가고
딸아이는 졸립다며 시원한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딸애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남편과 둘이서 휴양림 산책길에 나섰다.
2킬로 남짓한 산길을 산목의 향기를 더듬으며 나란히 걸었다.
얼마만의 호젓한 데이트인가. 살면서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피톤치드의 힘을 빌어 자연스럽게 뱉었다.
지금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당신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그리고 많이 미안하고 고맙다고.
흠칫 남편이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묵지도 않을 방을 하루 놀자고
덜컥 예약해 버린 무모함을 성토하던 아내가
갑자기 나긋나긋하게 돌변한 것에 적잖이 당황한 듯하다.
씨익 웃으며 ‘되돌릴 수 없으면 그 상황을 즐겨라’는 어느 구절을 들이대자
하여튼 못말리는 여자라고 웃는 남편의 얼굴이 하회탈같다.
유난히 수염이 많은 남편의 턱에 어느새 하얀 색깔이 듬성듬성 들어 서 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오래 서로 마주 보았던가.
‘사는게 바빠서’란 핑계로 어쩌면 의식적으로
서로의 얼굴을 외면했었던 건 아닐까.
어느 순간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참 당신도 많이 늙었구만.
얼굴에 못보던 주름이 세월타령 하는 것 같으이” 한다.
그랬다. 세월이 우리만큼은 그냥 지나갈 거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겠지만 그만큼 내 앞에 놓인 생이 아름답게 보였고
모든 것이 나를 둘러싸고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착각에 어떤 어려움도
당당하게 물리칠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그 시간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떠나왔던 걸까.
삶의 실타래는 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엉켜버린다는 것을,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에 몸을 맡기고 나를 버릴 수도 있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는 요즘.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은 더 애틋하기만 하다.
한걸음 앞서 가는 남편의 등을 바라본다.
“업어 줄까?”
술 마신 날의 늦은 귀가길이면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저 등에 업혀 바라보던 밤하늘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등의 온기에 묻혀 고개 들어 같은 방향을 향해
손가락에 힘을 주던 날들의 반짝이는 기억.
살풋 가슴을 긋고 가는 사금파리에 이내 코 끝이 찡해진다.
살아낸 흔적을 고스란히 지고 있는 남편의 등은 이젠 나를 업어주기엔
턱없이 좁아보인다. 그럼에도 묵묵한 등은 말없이 길을 걷는다.
이왕 요금을 지불했으니 산장에서 자고 새벽에 가자고 조르는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진 않으나 남편과 나의
월요일 출근길 걱정에 살살 달래어 귀로에 오른 시간이 밤 10시.
여름 한낮을 흔들던 아이들의 함성은 곤한 밤으로 들었고
야외 벤치에서 소곤소곤 이어지는 어른들의 정담이 휴양림을 채우고 있다.
반듯하게 조성된 방갈로 어디 쯤에선 낮에는 숨겨야 했던 연인들의 사랑이
은은한 조명으로 내 걸리고 길을 따라 파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산국은
달빛으로 뒤늦은 멱을 소리없이 감고 있다.
아쉬운 듯 뒤돌아보며 투덜대던 아이들도 휴양림을 빠져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잠잠해진다.
계곡의 양편으로 차 한 대 비켜설 여지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그 많은 차들이 깨끗하게 사라진 길은 비로소 시골의 정취를 가져다 준다.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시골의 바람은 한여름밤 임에도 서늘하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산자락을 휘감고
유유히 흐르는 산안개가 꿈결인 듯 밀려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탄성이 터졌다.
산자락을 죽 둘러 온통 빛나는 별밭이다.
달빛 아래 어둠을 사르는 저 도라지꽃 군락들이라니!
보아주는 이 없는 이 밤을 소곤소곤 모여앉아
낮동안 햇살에 그을린 얼굴들을 달빛에 씻고
바람으로 물기를 말리며 순수를 이어가는 영혼들.
하늘 어디에 저렇듯 많은 별들이 박혀있다
밤이면 내려오는 것일까 싶어 고개를 쳐들다 나는 말을 잊었다.
마악 잠에 들려고 자세를 잡던 아이들을 마구 찔러댔다.
두 아이의 감기던 눈이 초롱초롱한 탄성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쌀 가마니를 통째로 들어다 풀어놓은 것 같다고...
오염되지 않은 밤하늘, 어둠이 깊을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빛의 강도는
이 세상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표현에 못미치리라.
별들이 어둠으로 짠 은실을 마음에 휘감고 고개가 뒤로 젖혀진 아이들은
입을 다물 줄 모른다.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느라 신경을 조이던 남편이
최대한 속도를 줄여가며 자신도 가끔씩 하늘을 쳐다 본다.
다들 눈빛을 하늘에 고정시키고 나름대로의 별빛을 새기고 있다.
아마도 서로의 가슴 속에 곱게 간직한 별빛들이 그 순간 하늘의 별빛들과
키재기도 하고 또 다른 다짐을 두는 계기가 되리라.
내 가슴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별빛 하나도
오랜만에 산책을 나와 맑은 공기로 안을 헹군다.
“아빠, 다음에 우리 여기 또 오자. 꼭 또 데려올끼제..?”
“정말이지 이렇게 많은 별은 난생 처음본다 아이가”
아들녀석과 딸애가 감탄과 바램을 동시에 내뱉는다.
다들 컷다고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걸 좋아하던 애들이 스스로 가족의 일체감을 향한
주문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다.
은근히 감상적이 된 남편이 슬며시 나를 돌아보며 한 마디 한다.
“봐라, 니 안직도 숙박도 안할거면서 산장 빌린 게 아깝냐?”
머쓱한 마음을 남편의 옷깃을 여며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가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여름을 걸치고
팔 벌린 전봇대의 전깃줄에도 별들은 무한정 걸려있다.
고개가 아프다고 한 마디쯤 할 법도 한데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연과 순수에 목말라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시골의 밤하늘도
도심의 경계로 들어서면서 사라져버리고
서늘하던 숲향기 대신 후텁지근한 공기가 짜증스럽게 밀려든다.
일상에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오염의 심각성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도심의 중심에 들어서자 도로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상가 건물들마다 경쟁하듯 네온빛을 쏘아 올리고 있다.
날씬한 몸매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의상으로 뭇 시선을 유혹하는
마네킹들이 눈부신 조명아래 화려한 시대의 밤을 안고 있다.
반면 늦은 밤 하룻밤의 삶을 동냥하는 나부의
안타까운 몸짓 같은 어두컴컴한 거리의 마네킹도 있다.
길가에 죽 늘어서서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는 마네킹들은 하나같이
팔이 잘린 미완성의 얼굴로 이미 빛이 흐린 하늘을 향해 별빛을 보듬고 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빛을 마음으로 껴안는 안간힘이 슬퍼 보인다.
문득 저 마네킹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불현 듯 소름이 돋는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밤의 나부가 되어야 하는 저 마네킹들처럼
우리의 삶도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묵묵히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을 향해
간절한 눈빛 모두는 저 인형들에 비하면 갖은 변명을 들이대며
밤바라기 한 번 할 여유없는 삶을 사는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유약하고 초라한 존재인가.
남편의 강경한 주장으로 뜻하지 않게 치른 돈으로 인해
우리 식구는 살면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별빛 추억을 저장할 수 있었다.
언제 어느 때고 삶이 힘들 때면 가슴 속 저장고를 열고 소중하게 간직한
아름다운 기억을 만져볼 것이다. 멍석 위에 펼쳐 놓고 한참동안 별을 줍는 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