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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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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을 꿈꾸며


BY 최지인 2005-04-11

         다시 희망을 꿈꾸며


 봄비가 그치고 구름이 비껴간 하늘에 맑은 햇살이 계절의 힘을 발한다. 그 기세를 업고 조금씩 꽃망울이 퍼지는 나무 가지 사이로 세상을 한바퀴 휘돌아온 바람이 서성거린다. 봄바람이 묻혀 온 향기에 턱없이 느긋하게 풀어진 마음은 그냥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추어도 좋겠다는 상념에 든다. 그러다가 문득 밑도 끝도 없이 생뚱한 생의 의지 같은 것이 밀려든다.

 그것이 봄바람이든 계절이 가져다주는 마력 같은 힘이든 다시 마음에 희망을 심는다는 사실이 중요할 테지만 말이다.
 

혼자서 느끼기엔 이 소중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싫은 기색이 역력한 딸애를 데리고 뒷산으로 가벼운 산책길을 나선다. 책방에서 빌려온 책을 오늘까지 갖다주어야 하는데 아직 반도 못 봤다는 아이의 투덜거림이 따라온다.
 " 있지,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책 속에다 눈을 박아두는 건 어리석은 짓 아닐까. 때론 습관보다는 눈을 들어 바라보아야 하고, 느껴야할 중요한 순간들이 있는 법이거든..." 라며 거의 애원 조로 부탁하다시피 하면서까지 난 딸에게 꼭 심어주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영원히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고픈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푸른 시절인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우리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인생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푸른 청춘이 빛을 발할 때 이미 절반이상을 살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초침들이 유난히 빛을 발하던 그 때,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그 어떤 농도보다 짙게 가라앉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너무 늦게 서야 알게 되는 것처럼.
 

 눈앞에 막 개화의 탄성을 내지르는 개나리가 간간이 보이고 금방이라도 봉오리가 터지기 직전인 진달래도 보인다. 나도 모르게 '훅' 숨이 들이켜진다. 순간 단발머리 수줍던 가시내들의 웃음이 추억의 저 깊은 곳에서 방울방울 터져 나온다.
 

 시골집을 둘러싸고 있던 야트막한 산으로 온통 선홍빛 물감이 덮이면 발길마다 채이는 햇살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고파 안달하는 소녀들의 설렘이 이 산 저 산을 헤집고 다녔다. 한아름씩 꺾어든 진달래보다 마음이 먼저 물들고 꽃에 반사된 얼굴이 넘어가는 저녁 노을에 진달래 색보다 더 곱게 물이 들었던 그 때.

 누군가의 제안으로 봉오리에 입김을 불어넣어 꽃을 피우는 내기를 하였다. 후~ 한 번 입김에 미래의 희망과 꿈을 담았고, 후~ 두 번째 입김에 친구와의 영원한 우정을 다짐했고, 다음엔 짝사랑하는 선생님이 눈길 한 번 더 주셨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으며, 그 다음 입김엔 미움으로 박혀있는 서러움들을 날려보냈고...롱 다리에 개미허리의 소원도 있었고 누군가는 깔깔대는 웃음에 섞어 이성에의 관심과 책만 보면 친구하자고 달려드는 졸음을 몰아내고 싶다고도 했었다.

 

 양 볼이 뻐근하도록 불어도 고작 한 두 송이 피워놓는 것에 그쳤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의 모든 꽃이 우리들의 입김으로 인해 피어나는 것만 같은 착각에 젖어 다들 행복해 했었다. 뻐근하다 못해 누구한테 얻어맞은 듯 아프기까지 한 입 언저리를 쓸며 저녁밥상 앞에서 밥 숟가락질이 시원치 않아 부모님께 야단이야 듣던 말던 그 때 청춘들의 앞에 놓인 생이란 그토록 가슴 부풀리는 신비함이었고 아직 생의 고통을 체득해보지 못한 눈망울들은 터무니없이 호기심으로 꽉 찬 빛남의 순간 순간들이었다.
 

 세상 온갖 습기와 햇볕과 바람을 쏘인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속에 전에 없던 풀과 나무들이 자꾸만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사람들이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나무와 풀은 여러 형태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추억으로 남아있는 대부분은 그 사람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봄날이 아닐까. 치매에 걸린 노인 대부분이 유년의 고향이나 꽃다운 시절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과 아무 욕심 없이 순수하게 인간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만은 잊지 않고 반복해서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친구들이랑 엄마처럼 꼭 예쁜 추억하나 만들어야지". 딸애의 홍조 띤 다짐을 들으며 마음 한켠이 쓸쓸하다. 그 옛날 새겼던 수많은 꿈들은 지금쯤 어느 하늘을 헤매고 있는 건지, 그 때의 푸른 꿈이 아직 내게 남아 있긴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