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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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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살아도 ,,,,,,,,,,


BY 헬레네 2015-01-13

새해 업무를 시작한 첫날인 1월2일 금요일 오후2시 법원으로 이혼서류를 내러갔다.

주차를 하고 내려 몆발짝을 걷는데 누군가 차를 후진으로 빼고 있었다 .

손으로 수신호를 해주고 트렁크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신호까지 넣어주고

현관로비를 들어 서면서 허밍으로 콧노래까지 한음절을 부르는 그 인간을

보면서 정말 넌 참 알수없는 종자구나 싶었다.

 

서울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한 엄마가 춘천으로 와서 입원해 있다가 30일에 다시

수술한 병원으로 가서  수술후 경과를 보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엄마가 다시 춘천으로 오는걸로 알고 따라 온단다 .

엄마는 서울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는 설명에 그럼 우리집으로 와서 망년회겸

함께 시간을 갖자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

 

둘째언니가 형부가 돌아가시고 몆년째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소개도 할겸 자리를 갖자는것 같았다 . 횟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이 몆순배

도는데 취기가 오르는 남편이 위험수위에 이르는것 같아서 경계를 시켰지만

소용 없었다 .

 

횟집을 나와서 노래방을 가자는 제의에 내키지 않았지만 다들 좋아라 하니

따라 갔는데 횟집에서 나오면서 부터 둘째언니가 데리고 온 아저씨에게 슬슬

시비를 거는데 불안했다 . 노래방에서 술좀 그만 마시라는 내말에 티나게 삐걱대니

언니들 둘이 교대로 옆에가서 달래자 남편은 3살이 되었다 .

급기야 노래방서 부터 집까지 제발로 못걸어 오고 부축을 받고 겨우 왔다 .

 

집에와서 들어가 자라는 내말을 무시하고 술을 더 먹겠다며 버티면서 옆사람에게 자꾸

시비를 걸다가 결국 나의 인내력이 폭발을 하고 언성이 높아지고 나서야 어찌어찌 안방으로

들어 갔는데 원래 각방을 쓰던 사이 였지만 손님이 있는관계로 남편의 방과 거실에 자리를

마련하고 두쌍이 알아서 자라하고 방으로 들어가 새벽녁에 살짝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새벽6시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안방과 화장실까지 똥은 범벅이고 그런채로 벌거벗은 몸에

똥칠을 한채 잠들어 있는 인간을 내려다 보다가 살그머니 거실로 나오니 다들 자고있었다.

 

샤워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동영상과 사진을찍고 한해의 마지막날 출근을했다 .

10시가 넘어서 언니에게 전화해서 안방문을 열어보지 말것과 딸아이에게도 그렇게

전하라고 부탁했다 . 혹시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느라 열어볼까 ? 안방화장실에서

드라이를 사용하는 딸이 들어갈까 불안하고 초조했다 .

 

도저히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않아 언니에게 다시 전화했다 .

내가 들어가서 해장국이라도 함께 먹고 잘가라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못되니 미안하지만 잘가라고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고 .......... 오후 4시 딸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더니 거절한다 . 저녁나절 어디냐고 묻길레 엄마가 데리러 갈께

했더니 그러란다 . 세수도 안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게 모든걸 알고 있는것 같았다 .

 

" 다 봤니 ? " " 응" 그랬구나 ......... 잠시 말이 없다가 집에가자며 앞장서서 걸어오는

내 뒤를 말없이 따라온다 . 1년이면 한두번 그런 사고를 치고 때론 순찰차에서

흙투성이 피투성이의 몰골로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나타 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출한번 안해보고 속 한번 안썩여본 착한딸이다 .

공부를 곧잘하던 아이가 사춘기때부터 성적이 떨어지고 명문대를 못갔어도 그저

미안하고 안타깝고 고마운 딸이다 .

 

집으로 돌아와 안방문을 열으니 대충닦은 흔적으로 여기저기 말이 아니었다 .

윗도리도 입지 않은채 이불을 덮고 자고 있길레 이불을 모두 걷어서 내어놓고

걸레를 주며 닦으라 했다 . 전같지 않은 나의 서슬에 닦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

그사이 베란다에 나와서 여름에쓰던 파리채를 안방에 가져다 놨다가 흠씬 패줬다.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 했으니 많이 당황 스러웠을 것 이다 .

 

차마 전화로 물어볼수가 없어서 언니에게 문자로 물어봤다 . 봤냐고 답신이 왔다.

" 할말이 없다 " 옘병 딱 10년전에 대가족이 휴양림으로 놀러가서 입은채로 소변을

보는것을 다 함께 목격했고 그후로 무수한 일이 있었지만 한번도 이야기한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언니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것이다 .

 

다음날 10년전에 내가 불러 주는대로 남편이 받아 썼고 함께 법원에가서 공증을 받아놓았던

서류와 맞아서 뇌진탕으로 입원했던 서류 그리고 내 휴대폰의 자료들을 꺼내어 놓고 딸아이

까지 불러 앉혀놓고 가족회의를 했다 .

 

나 변호사 사무실에 갔었다 .자료들을 보여주고 이혼소송을 하겠다고 했다. 당신이10년

전에 공증한 서류에 친 인척들 앞에서 대 소변을 본다면 양육권및 재산권 모두 포기하겠

다는 문구가 들어있고 지금 내 휴대폰에는 영상이 들었있다 .

그런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땅 두필지와 이집을 대략 5억이라고 했을때 성공 보수금을

20%를 요구한다 . 그러면 변호사에게 1억을 줘야 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마 1억을 받고 합의를 할래 아니면 소송으로 가서 한푼도 못받고 나갈래 ? 대답을 안한다 .

내일까지 대답이 없으면 1월 2일날 소송 들어갈께 나의 선언에 한번만 봐 달란다 . 당신은 나한테

마지막 으로 봐 달라는 말은 이미 많이 썼고 무릎도 너무 많이 꿇었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마 

옆에서 잠자코 있는 딸에게 너도 이젠 성인 이잖아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문제돼? " 아니"

젊어서 안 그러던 사람도 늙으면 똥 오줌 싸는데 점점 더 하면 더하지 덜해지지 않잖아

엄마 나이가 55세야 이젠 나도 늙어서 힘들고 지친다 . 20년 넘게 그렇게 살았으면 됐지

나도 이젠 나를 위해서 살아야겠어 그렇게들 알아 .

 

그렇게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지금은 숙려기간 아무에게도 이혼사실을 알리지 않고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알다시피  나 지금 현금이 없잖아 은행에서 대출을 조금빼서

사천정도의 원룸을 하나 얻어줄께 그리고 봄이되면 싸게라도 내 놔서 땅이 팔리는데로

남어지 현금을 마련해 줄테니 그렇게 알아  하는 내말에 3월초에 포항으로 3년짜리 공사를

가면 방을 얻어 놔 봐야 무용지물인데 하며 말을 흐린다 .

남편은 2013년 하순부터 정화조 오폐수를 연결하는 하수관거 공사현장에 따라 다녔다.

 

엄마 에게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 있기 싫다고 .... 엄마가 사시던 집은 병원으로 가면서

비워놓은 데다 산밑인지라 평소에도 기온이 낮은곳인데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서 수도물까지

얼어 모든것이 해빙이나 되어야 가능하니 다시 우리집으로 모셔 와야하는데 아무도 모르는

나의 이혼을 굳이 알리고 싶지않아 그럼 모시러 갈까요 ? 했더니 니네집은 침대가 없어서

앉았다 일어섰다가 힘들고 조서방도 있어서 가기 싫단다 .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를 한방병원에 모시자고 하면서

한달 입원비가 300만원인데 오남매가 나눠 내잖다. 그걸 수용할 엄마도 아니다 .

언니가 살고있는 곳이 병원 인근이고 삼남매가 다 출가해서 따로 살고 아이들이 쓰던 침대는

두개씩이나 남아도니 엄마를 모시기엔 최적의 조건인 언니가 찔리니까 머리를 쓴거다 .

 

우리집 거실에 푹 꺼져있던 3인용 쇼파를 매트를 걷어내고 위에다 송판을 사다 못질을 해서

임시로 간이용 침대를 만들고 엄마를 퇴원시켜서 모시고 왔는데 미국서 유학하던 조카가 함께

따라 왔다.우리딸이 언니가 2년만에 왔다고 치맥을 사들고 들어왔다 .

" 이모부도 드세요 " 하길레 이모부는 금주기간이야 하고 쳐다보니 얼른 시선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 이런 저런 눈치가 살펴 졌는지 엄마가 묻는다 . 무슨일 있었냐고?

아니라고 부인을 하는데도 자꾸 캐 묻는다 .

 

" 엄마 날씨도 어느날은 바람불고 어느날은 흐리잖아 그냥 그려려니 하고 넘기세요 "

절대로 그게 안되는 엄마란걸 알면서도 부부간의 문제를 굳이 다 알려고 하냐고

말을 피했다 . 그렇게 몇일후 ..... 토요일에 가끔 오르던 뒷산이나 갈까 하고 나서는데

엄마가 막아서며 조 서방도 데리고 가란다 헛참 .... 왜 그래야 하냐니까 같이 안갈려면

너도 가지 말란다 . 알았다고 그럼 안가지뭐 다시 안방에 가서 누웠는데 얼마후 엄마가

방으로 들어 오더니" 나 이집에서 나갈란다" 하면서 나 땜에 니들이 그러는거 같으니

내가 나간다며 보따리를 싸면서 독기를 부리고 있었다 . 아니라고 그냥 무슨일이 있나

부다 하고 좀 기다려 주면 안되겠냐고 내가 이렇게 사정좀 합시다 , 해도 그럼 뭣 땜에

 그러는거냐며 캐 묻고있다 . 지척에 사는 당신아들이 한번도 엄마를 자기집에 모셔

가겠다고를 안하는데 아들에게 전화를 했단다 . 데리러 오라고  품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도

바깥에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캐내어 묻지 않는 것인데  뭐든 다 캐묻고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엄마가 육십이 다 되어가는 딸의 사생활 까지도 알아야 겠다고 덤비신다 . 

어떻게든 한통 속에서 돌아야만하는 지긋지긋한  통돌이 세탁기의 삶의 방식이다.

 

잠시후 남동생이 전화가 왔다 .

무슨일이냐고 ? 어디서 부터 무슨이야기 부터 해야하나 ?? 난감했다 . 

혼자서 뒷산에 바람쐬러 간다고 띄엄뛰엄 이야기 하는데 공무원인 남동생은 승진과 함께

강릉으로 1년을 나가 있다가 최근에 다시 이곳으로 왔으니 업무파악 하느라 일이 많았을것이다 .

대뜸 " 내가 다시 이곳으로 오면서 정신없이 바쁜데 너무한다 들 ....." 머리 뒤 쪽에서 건전지가

팡 하고 터지는 느낌 이었다 . 내가 그렇게 여러차례 엄마를 모시고 서울을 오르내리고

병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오르내려도 말 한마디 없었던 놈이 들이라하네 헛참 ......

" 너 들이라고 했냐 ? " 정색을 하자 아니 엄마 말이야 하며 얼른 말을 돌린다 .

다 들 자기 입장만 생각 하는게 인간 이라지만 정말 뭐라 할말이 없다 .

 

워낙 유별난 엄마인지라 다른 사람이라도 편하게 살라고 지금껏 나서서 다 해 주었건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급기야 화가나서 그렇게 알고 싶어 때론 모르는게 약인데

우리 1월2일에 이혼 했거든 지금 숙려 기간이야 조 서방은 3월초에 포항으로 일하러

가는것 처럼 가고 엄마는 3월말이나 4월초쯤 해동하면 가고 그렇게 자연 스럽게 나가려고

한거야 이유 엄마도 목격했던 적 있었지 똥을 쌌어 아주 철갑을 했어 그걸 큰언니 둘째언니

수현이 다 봤어 이제 속이 시원해 하는 내말에 잠시 가만히 있더니 " 조 서방이 그런게 첨도

아닌데 여태 살다가 왜 이제와서 이혼하는데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엄마는 내가

늙어서 내몸도 힘든데 언제까지 똥 치닦거리 하길 바래는거야 나도 좀 인간답게 나를 위해서

품위있게 내 남아있는 날들을 살고 싶어 " 참았던 일갈이 터지고 겨우 며칠 달랬던 아이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엄마가 미웠다 .

 

나는 갈꺼야 이혼한 딸년집에 한신들 내가 왜 있어 하며 다리를 질질끌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침대까지 짜놓은 성의를 봐서그냥있어

제발,,,, 이렇게 가면 나 다신 안볼거지 달래고 있는데 남동생이 왔다 .

 

기어이 남동생을 따라 가고난뒤 저녁무렵 남동생 내외가 엄마를 모셔다 놓고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 저녁은 생각이 없고 답답한 마음에 술만 몆잔씩 마시고 헤여 졌는데

일요일 오전 10시쯤 전화가 왔다 . 남동생이 하는말 " 누나 엄마가 자꾸 조양리 당신집에

데려다 달라는데 " 기다려 이따가 모시러 갈께 그 한마디에 " 알았어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겨우 하룻밤을 자고 보따리를 들고 다시 모셔 왔더니 뻘쭘 했는지 앉아 보란다 .

그리고 하는말 조 서방 이젠 다시 태어 났다 생각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어쩌구 저쩌구

사람이 명심을 해야지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에고 니 애비도 그렇게 술을 안먹는다고

혈서까지 쓰더라만 안되드라 #$%^& 순간 피가 확 멈추는 느낌이었다 .

어차피 안되니까 어쩌란 말이야 ?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데 이 인간 히죽이 웃고있다 .

 

생각이 없어도 어떻게 저럴수가 있단 말인가 ? 무려 40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우리의

치부인 흑역사를 굳이 함께 묶어서 이야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

 

엄마가 나서서 가려운데를 다 긁어주고 문제 해결을 다해주니 나하고 이런저런 얘길 할 필요

조차도 없어졌고 우리는 아무일도 없었다 .마치 그런 얼굴로 이 인간은 월요일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러 나가면서 혼자 생각했다 . 지적 장애인 둘을 데리고 살자니 참 고단하구나 .

오늘 마침 5일장이 열리는 풍물 장날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가 어제 부탁한 약재가 있기에

그걸 사려고 둘러 보는데 누군가 뛰어오며 " 자기야" 외쳐부르며 내 앞을 막아선다 .

헉 ..... 어제 당사자인 나를 제쳐두고 엄마가 한 이야기로 모든것이 정상화가 된 저애가

정상인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2일에 도장을 찍고야 말겠다고 벼르는 내가 이상한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