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볕이 거실 가운데까지 놀러와 아이와 한바탕 술래잡기를 할 때쯤,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왔다.
“큰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빨리 짐 싸라. 어제 밤 11시에 돌아가셨으께 내일모레쯤 올끼다.”
등은 반쯤 구부러져 걸음 걷기도 불편해 보이던 몸을 이끄시고는 명절날 나를 마당 한 곁으로 부르시더니 “야야, 나는 니 시아버지나 시어마이가 와 니보다 너거 동서를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첫째인 니한테 차갑게 하는 거 보면 마이 안됐다. 자 이거 내가 담은 간장인데 가져가거라. 니만 주는기다. 참고 기다리면 니 시부모님들도 잘해 줄 날이 있을끼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참 힘들 때 해 주신 말이라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10개월된 아이를 들쳐 업고 유치원에 가 있는 첫째 아이를 데리고 거제도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벌써 자식들과 친척들이 와 있었다. 내일이 장지로 가는 날이라 집 안은 시끌법석하였다. 상주들은 안방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연신 절을 하기도 하고, 집이 떠나갈 듯 멀리서 오는 손님들에게 길안내도 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저녁에 올 많은 손님들에 대비하여 마당에 천막을 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은 굴이다 멍게다 잡아 오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내일 장지에 갈 음식을 맞추느라 읍내에 나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 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들은 며느리들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부침개와 국을 만들고, 돼지고기 편육과 떡은 주문하고, 종이컵이다 일회용 접시와 그릇은 사오고,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끊임없이 오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담아 나르는 일도 며느리들의 몫이고, 사람과 음식이 꼭 맞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일인 것이다. 안주인이 없는 부엌에는 이곳저곳에 음식이 널여져 있었다.
바쁜 어른들 속에서 신난 건 아이들뿐이다. 음식을 나르는 어른들 사이로 요리조리 솜씨 좋게 빠져 나가며 술래잡기를 하는가 하면, 남자 아이들은 작은 방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오가라고 치워놓은 방 한 곁은 아이들의 놀이터를 방불케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이들에겐 명절에만 볼 수 있는 친척 아이들과 며칠씩이나 함께 놀 수 있는 땡 잡은 날에 불과한 것이다. 눈썰매장 못 간다고 입이 당나발처럼 튀어나와 있던 아들은 형들을 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형들을 따라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다.
이런 떠들썩한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조용한 사람이 있었다.
80이 넘은 아내를 잃은 큰아버님은 사람들에 밀려 방 한 귀퉁이의 낡고 큰 의자에 몸을 파묻고 계셨다. 구부러진 등과 굵게 패인 주름살은 그날따라 더욱 슬픔에 젖어 있었고 무엇인가를 계속 입으로 중얼중얼 거리고 계셨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내가 밤 12시쯤에 전화를 했으면 시방 올 일이지 뭐랐고 왜 전화를 했느냐고 어무이 마지막 가는 길에 손이라도 잡아주고 지금 이게 무슨 소용이고 저것들 잘 먹을라고 하는 일이제......내가 속에 불이 난다 말을 안 하믄 터졌쁜다” 자식들이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못내 속이 상하셨던 모양이다.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아침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시다. 나중에는 피곤하셨는지 작은 방에 누워 가슴을 치시더니 눈물이 고인 채 잠이 드셨다. 60년 넘게 한 솥밥을 먹은 남편만이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할머니의 죽음을 가슴 깊숙이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전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집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거실을 지나 제일 안쪽의 안방 안에 차려져 있었다. 거실에는 손님들 접대를 위해 큰 상들이 3줄로 길게 펴져 있고, 위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그 사이를 음식을 나르는 사람, 뛰노는 아이들, 친척들이 오가고 있었고, 안방에는 할머니의 사진과 향, 국화꽃만이 덩그란이 놓여있었다. 상주들은 다 어디로 가고 사진 속의 할머니만이 벽을 멍하니 보고 계셨다.
그 때, 아이들과 함께 놀던 4살난 조카 손녀가 소란함과 고요함을 가르는 문지방을 냉큼 넘어갔다. 멀리서 바라보는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에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누워 발을 구르며 울어대던 3살박이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는 숙모로서는 아이가 혹시나 사진을 넘어뜨린다든지 국화꽃을 한 아름 가지고 나오는 실수를 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큰어머니가 중풍으로 오래 앓아서 이 아이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실 끝에 있던 나는 뛰어가 말리기엔 너무 늦은 터라 불안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이는 영전 사진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양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영주예요. 할머니, 춥지요? 하늘나라로 잘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꾸뻑 인사를 하고는 부끄러운 듯 달려 나와서는 또다시 아이들과 어울렸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 중에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제대로 한 사람은 할아버지 다음으로 이 아이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쓸쓸하게 가실 뻔 했던 할머니의 마지막 길이 고사리 같은 작은 아이의 배웅으로 따뜻하고 넉넉한 꽃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