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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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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의 두 화음


BY 김정인 2005-01-21

 

 엄마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가끔씩 마음이 울적하시거나 내가 엄마와 비슷한 억울한 경우를 당할 경우에는 툭툭 한마디씩 자신의 얘기를 하신다. 특히, 철없는 딸이 엄마가 속상할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시댁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얘기할 때는 나보다 더 열변을 토하시며 딸의 둘도 없는 수호자가 되어 주신다.

항상 고맙다.

 2년 동안 엄마는 직장 생활하는 나의 아이를 봐 주시더니, 동생이 장사를 시작하고부터는 그 집 아이들을 봐 주러 이사까지 가셨다. 아직은 삶의 전쟁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딸들이 안쓰럽게 보이시는지 엄마는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고 항상 노심초사다. 이제는 우리가 70을 바라보시는 엄마를 보살펴 드려야 할 때인데 말이다.

 

여느 모녀간이 다 그렇듯이 나에게는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가장 반갑다. 받기만 하는 비싼 휴대전화라도 엄마와 통화 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구 쓴다. 자주 만날 수 없기에 손바닥만한 기계를 통해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당나귀 귀가 된다. 교회에서 부녀회 회장이 되었는데 글씨도 모르는 내가 잘 할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며 조금은 수줍고 떨린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조카들이 말을 안 들어 속상해 죽겠다며 벼락같이 화난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아픈 동생이 밥을 안 먹는다고 지친 목소리를 내시기도 하고, 장사하느라 바쁜 동생이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기쁜 소리에는 엄마보다 더 신나서 호들갑을 떨고, 속상하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인 판사가 되어 피해자인 엄마의 정당함과 가해자의 말도 안 되는 잘못을 낱낱이 파헤쳐 엄마의 일방적인 승리를 선고한다. 그러나 가해자가 동생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방적으로 엄마 편을 들 수도 없고, 동생 편도 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나는 의례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가 속상하시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동생에게는 엄마의 그런 마음을 은근히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러기를 몇 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동생의 말과 엄마의 말이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동생이 돈이라면 벌벌 떨면서 준다준다 하면서 안 준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의 말은  ‘오늘은 너무 늦어서 못 주어 내일 장사해서 준다’고 했더니, 엄마가 장사가 안 되나 하며 걱정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답답해서 다그쳐 물어도 엄마의 말은 왔다갔다 어떤 마음이 진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나도 화가 나 ‘동생에게 그렇게 말했으면 섭섭해 하지 말든지, 속상하지 않으려면 하고 싶은 말을 하든지’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왜 모르겠는가. 엄마의 마음을. 엄마가 내게 하는 말과 동생에게 하는 말 사이에는 자신조차도 모르게 구깃구깃 황급히 쑤셔 넣은 마음조각이 있다는 것을.


동생이 엄마에게 양육비를 주는 날은 25일이다. 장사한다고 빌려간 돈과 함께 주기로 했다. 그런데, 동생은 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빠서 일수도 있고, 장사가 안 되어 돈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동생의 듬성듬성한 성격 탓일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엄마는 수입의 반이 양육비이며,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을 정기 적금을 넣는 분이시며, 모든 공과금을 제 날짜에 내어야 마음이 편안한 분이시다. 그러다 보니, 이런 동생과 엄마 사이에는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화남이 오갈 때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문제가 양육비를 날짜에 맞추어 주지 않을 때이다. 늦추어진 며칠 동안 엄마의 마음에는 온갖 감정이 뿌옇게 일어나며 목구멍까지 차 올라온다. 화가 나 하루 종일 동생에게 할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공과금도 내야하고 적금도 넣는 날짜가 지났는데 왜 양육비는 안 주냐. 며칠 늦어지는 통에 얼마나 손해가 많은지 아냐? 뻔히 그 돈으로 생활하는 줄 알면서 너도 너무하다. 엄마 생각을 손톱만큼이라도 하는 거냐? 허구 한 날 피곤하다 핑계로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말 한마디 안 하고 집으로 횅하니 가 버리고. 아이들 먹고 싶은 것은 사오면서 나에게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나 봤냐? 나도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렸으면 저녁이면 너희들이 데리고 가서 봐야 될 거 아니냐?’ 

그러나 동생이 저만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태도가 360도 확 변한다.

 ‘밥은 먹었니? 챙겨줄까? 얼굴이 핼쑥하다. 장사는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아이들은 잘 있었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옷은 좀 두툼하게 입고 다니지. 피곤하지 어서 가서 자라.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자마.’ 

30의 어린 나이에 살아보겠다고 시장바닥에 나가 생선냄새 풀풀 날리며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애잔한 마음이 속과는 다른 엉뚱한 소리를 내게 했으리라.


자식에 대한 마음과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부딪혀 나는 어울리지 않는 엄마의 두 화음은 힘들어하는 자식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의 소리이며,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시려 안간힘을 쓰시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전화가 끊어진 한참 후에도 마음 저 편까지 가슴 아프게 오래도록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