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금요일 날 남편이 새벽 시장을 가서 산낙지 한 접을 사서 아이스박스에
얼음까지 넣어 포장을 해왔다.
그 사이 나는 집에 남아 있을 딸과 아들이 먹을 반찬등을 준비 해 놓고
서울에 다녀 올 여행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는 열차를 이용하여 서울에 사는 큰댁 (시숙님)으로 시아버님
기일을 지내러 올라 갔다.
좀 무거웠지만 고향에서 올라 온 산낙지를 보고 모두들 좋아하니 힘들게 가져 간
보람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시숙님 사시는 곳에서 차로 한 두시간 거리 정도로 떨어져 살고 있는 시동생들
내외와 조카들이 모이고 산낙지를 참기름 발라 생으로 먹고 데쳐서 초장에
먹고 떠들썩하여지니 시아버님 생각이 났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살아계셨던 시아버님은 이렇게 자식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있을 때면 허허 웃으시며 흐믓하신 눈빛으로 바라 보시곤 하셨었다. 다시
오셔서 같이 산낙지를 드셨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젠 아버님이 그리 예뻐 하시던 손자들과 마음에 들어 하시던 손녀사위까지
와서 당신의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을 어디선가 멀리서 바라보시고 계실 것만
같아 마음이 왠지 서글프고 텅 빈 터널 속 같았다.
밤 열두시에 제사를 지냈다.
예전에는 아버님이 상을 차리고 술을 따라 놓는 것 까지 자상하게 일러
주시곤 했는데 이젠 형제들이 서로 아버님이 가르쳐주시던 기억을 떠올리며
순서대로 해 나갔다.
정말 부모님께는 살아실제 한 번 이라도 더 가까이서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아버님 안 계신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하게 음식을 먹으며 많지 않은 얘기지만 서로 들어주며 나누고 일찍
헤어지는 서운함을 남겨둔채 형제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쁜 일 때문에 새벽에 각자 집으로 돌아 가야 했다.
아버님이 계셨을 때에는 시골에서 제사를 지내고나면 아침에 가까운 친척이며
이웃집 어른들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하느라 참 바쁘고 힘들었지만 사람사는
맛이 있었었다.
그런데 이젠 우리 형제들만 모여서 제를 지내고 새벽에 헤어져 가니 참 간단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서운했지만 한편 이해도 되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야 하는 현대의 생활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한 숨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 열차로 집에 돌아 왔다.
이틀간의 짧은 해후였지만 형제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었다.
기운 없이 쓰러진 소에게 산낙지를 먹이면 벌떡 일어난다는 그 산낙지의
효험이 피로에 지친 형제들에게 기운을 펄펄 나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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