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이라 했던 허난설헌이 27세에 요절을 하였다.
시대를 잘 못 태어난 탓에 결혼생활마저 행복하게 살지 못했었던 그녀는 끝내 글재주도 더 넓고 크게 펼쳐내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끝내야 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는 마음이 아프다.
글이라고까지 할 수 없는 글을 써 놓고 간직하여 가는 내 삶은 그녀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흉내지만, 같은 여자이며 주부라는 입장에서 보면 십분 이해가 간다.
16세기 조선 전기에 시대적 규범 자체가 활달한 기상을 가진 여성에 대해 허용 적이고 자유로웠던 탓에 송덕봉은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소신껏 살다 간 여성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행하고 남편 미암 유희춘과 詩를 주고 받고 장기도 두었을 정도로 허난설헌 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았던 복 있는 여성이었다.
끊임없이 바깥세상을 향한 욕망을 감추지 못해 임금의 행차 시 일부러 구경을 갔고, 전답을 사 들이고 집을 증축 하는데 감독을 할 정도로 활달한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남편에게서 당당하게 아내의 대우를 요구하고 대우 받았던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죽은 뒤에도 다시 장가들지 말라고.
현재도 아니고 조선시대의 아내로써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 되는데 사임당은 당당하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을 무시하거나 집안 살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임당에 대해서는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정도로 현숙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여성이라 두 말 할 필요가 없으리라.
16세기 후반에 여성적 필화사건의 주인공 이었던 이옥봉.
그녀는 서녀로 태어났기에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지만, 남편을 스스로 선택한 여성이었다.
시인이었던 그녀는 이백의 시 보다 자신의 시가 뛰어나다고 자부하였었다.
후에 필화 사건으로 남편에게 소박맞고 불운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지만 천재 시인이라 알려져 오고 있다.
제주 갑부 김만덕은 양인으로써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상인이 되어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큰 재력가가 되었다.
제주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재산을 풀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주기도 했던 결단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제주 여인은 제주를 벗어나 나갈 수 없다는 국법이라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니 지금에 김만덕이 태어났다면 세계적으로 사업을 펼치며 더 크게 살았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음식 디미방의 저자 안동 장씨와 시인 김호연재, 조선 시대의 여성 철학자 임윤지당등의 삶을 뒤 밟아 가며 마치 그 시대에서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는 듯 감동을 받으며 한권의 책을 다 읽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그 여성들처럼 당당하게 내 인생을 내 세워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의문으로 남기고 이제 현실에서 나마 의미 있는 나날을 찾고 저 한다.
2006.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