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그 속삭임을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한들
나는 이제 눈 멀어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 가슴에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네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가 닿을 수 없는 빛과 소리의 길을
오래된 짐꾸러미 속에
네 편지를 다시 접어 넣다가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