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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전화


BY 하나 2004-09-08

하루종일 듣는 소리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전화벨 소리라고 스스로 답해본다.

내이름 석자를 부르는 소리도 아니요

엄마 소리도 아니요

전화벨 소리...

하지만 전화를 안 받을 수 없다, 전화벨소리가 자주 울린다는 건 회사가 바쁘게 돌아간다는 거고, 회사가 바쁘면 한가함으로 인해 찾아드는 눈치 볼 일도 없고,

월급받는게 왠지 모르게 더 당당해지고,

이것저것 이유 댈 필요 없이

나는 내가 속한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므로...

전화란 것이 참 희한도 하지.

상대방 얼굴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어쩜 상대방의 모습과 감정은 그렇게 생생하게  고스란히 내게 보여지는지..

고객의 질문에 빠르고 정확한 답을 못했을 때 가차없이 그 댓가로 상소리를 지불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도 영화에서 보던 조폭 사나이들처럼 험상궂게 생겼을거야, 어린 나는 그렇게 그림을 그려 보았었다. 하지만, 어느 땐가 전화속에서 그러했던 그들이 내 앞에 너무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후로는 그런 그림은 더이상 그려지지 않는다.  멀쩡하게 생긴 , 우리랑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외양을 보고 나는 쓰러질 듯한 놀라움을 간신히 추스른다. 그런 멋진 외모에 어쩜 속사람은 하나도 자라지 못했는지 안타깝기도 하련만 차마 말은 못한다.

오늘 아침엔 목소리가 가느다란 여자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속의 여자는 내게 이것저것 집요하게 질문한다.

답이 좀 느려진다, 자료를 찾아야 하므로...

기다리는 동안 수화기는 내 왼쪽 어깨와 얼굴 사이에 떨어질듯말듯 끼어있다, 오른손으로는 열심히 서류를 뒤적여야 하므로...

수화기 속 여자는 너무나 여성스런 목소리를 가졌다. 적어도 늦어지는 답변에 상소리를 지불할 사람은 아닌듯 하다.

전화기 속에서 소음이 들린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있는가보다.

뒤이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00애기 똥 쌌나봐요!"

새로운 여자가 전화기 저편에서 외친다.

"어..그냥 놔둬!!! 현우야!!!! 장난하지 말랬지? 저쪽가서 놀앗!"

조금전의 그 여자다, 내가 여성스런 목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

그런데 그녀는 지금 버럭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림을 그려본다. 그녀는 아마도 아기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어느 아기가 기저귀에 똥을 쌌고, 어느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렸지만 금새 기저귀를 갈아주니는 않는다. 떠들고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에게 시끄럽다고 저쪽에 가서 놀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

마음이 아프다. 그 순간 나는 직장인이 아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이제 15개월된 우리 둘째가 오버랩된다.

우리 어머님은 손주를 봐주시면서도 행여나 엉덩이 짓무를까싶어서

한여름엔 기저귀도 채우지 않으셨다. 아기의 대소변을 손수 치워주셨다.

그런데 지금 전화기속의 그녀는 "그냥 둬"라고 외친다.

내 마음이 아픈건 왜일까?

엄마의 직장생활로 엄마는 늘 거기에 없다. 그 엄마의 빈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워놓았을 아이들, 우리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저녁을 기다릴 아이들이 떠올라서...

나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외양만 크는 것이, 겉모습만 가꾸어가는 것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나는 속사람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힘차게 다시 수화기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