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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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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위에 서서...


BY 하나 2004-09-01

바람이 분다.

스스로의 열기에 지쳐 슬글슬금 달아나버린 여름 공기 틈으로  성급한 가을이 비집고 들어와 시원함이 느껴지는 바람이다.

며칠전에 새로 깔린 아스팔트는 아직 이 동네에 적응을 못했다.

길바닥은 한층 위로 올라와 가뜩이나 낮은 집들을 더 낮아 보이게 한다.

제멋대로 나 있는 골목길을 끼고 저마다 문을 낸 집들은 새까만 아스팔트를 경계로 조각조각 나뉘어 버렸다. 처음부터 모서리가 제대로 들어맞지 않아 억지로는 끼워맞출 수도 없는 퍼즐같이 되어버렸다.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움푹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또 한번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날려버린다.

눈을 들어 본다.

먼발치로 산이 담처럼 둘러져 있다. 산아래 그나마 청명한 곳은 약수터와 아파트 단지들이 선점해버렸고, 반대편 쪽으로는 공단이 넓게 펼쳐져있다. 공단이 끝나는 즈음엔 4차선 고속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진다. 온갖 종류의 차들이 경주하듯 그 위를 달리고  슝슝 소리가 재빠르게 공기를 가를무렵 먼지바람은 쉼없이 일어나 지붕들을 덮는다.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바람이 불면 군데군데 제 색깔을 드러내는 울긋불긋한 지붕들, 이 동네는 그렇게 낮은 단독주택가다. 산에서 부는 청명한 바람은 늘 먼지바람을 이기지 못해 감히 이 동네에는 근접하질 못하고만다.

창문을 열어두면 이내 미세한 모래 알갱이들이 발에 밟히지만, 누구도 그때마다 걸레를 들진 않는다. 창문을 아무리 꼭꼭 닫아두어도 보이지 않는 틈으로 어떻게든지 먼지바람은 비집고 들어와 집안 구석구석 또아리를 튼다. 하지만, 더운날에는 너나없이 창문을 열고 그 남루한 살림살이를 보여준다. 그렇게 산다, 살아야한다.

여기 빌라에서 내려다보면 집집마다의 옥상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아직 가을을 맞지 못한 옥상에는 초록빛이 왕성하다.

좁은 땅을 넓히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옥상을 만들고, 과일박스로 쓰였을 스티로품이나 나무상자로 아주 작은 밭을 연이어 만들었다. 봄이면 씨앗뿌리기 바쁘고, 여름이 되기가 무섭게 고추, 상추,가지, 파, 열무, 배추들이 자라고 그것들은 여지없이 사람들 입을 즐겁게 해주었으며,그래서 옥상에 올라갈 땐 누구라도  농사꾼이 되어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열에 한 집은 옥상에 꽃이 만발했지만, 그런 집은 다만 부부만이 호젓하게 외로움과 벗하며 사는 집이고, 채소가 무성한 옥상을 가진 집들은 더불어  식구들도 그만큼 북적대는 집이다.

옥상위에는 높에 빨랫줄이 매어져있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면서 햇볕이 따스한 날엔 빨랫줄은 빼곡하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이 부는대로 하늘높이 올라간 빨래는 이내 빨래집게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겉보기엔 똑같아 보이는 옥상이고 집인데...

빨래들은 그네들의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속에 담겨 있을 땐 모두 같은 빨래일텐데, 빨랫줄에 널려 햇빛을 받을 때는 남루한 옷들과 그렇지 않은 옷들이 확연히 구분이 간다.

남루한 옷들은 힘겹게 빨랫줄을 부여잡고 있다.

언제쯤 이 동네를 벗어나려나 한숨 쉰 적도 있었지만, 인정 많은 사람들 틈에 살다보니 잊은지 오래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옷이 남루할 뿐이지, 다만 집이 낡았을 뿐이지

사람마저 낡은 것은 결코 아니므로...

정성껏 가꾼 채소를 나눠먹는 인심과 내 옥상을 맘껏 이웃에게 내어주는 마음들이 포근하게 나를 감싼다.

오늘도 바람이 기운차게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