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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숨겨라


BY 蓮堂 2006-02-06

 
 

거창한 직함도 지위도 아니면서 뭇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의 중심에 서 있다보면 자기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딸아이가 경기도 임용고사에 다시 합격하고 대기 발령 중에 있다. 재직 중이던 학교에 사표를 재출하고 살 집을 구하려고 혹한에 부동산을 훑고 다녔다.

올 가을에 제대하는 아들 녀석도 복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들 녀석 학교 근처에 집을 얻으려고 추운 날 발이 부르트도록 혼자서 사당동과 방배동 일대를 헤맸다고 한다.

생각만큼 마땅한 집이 없어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자기 직업에 별다른 유난을 떨지 않는 딸아이가 부동산의 중개사가 직업을 묻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초등학교 교사’라고 직업을 밝혔다고 한다.

혹시라도 직업을 밝히면 좀더 친절하게 좋은 집 안내를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의 발로에서였다. - 딸아이는 어디서든지 좀 체로 직업을 밝히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여교사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자 더욱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혹시라도 과시 한다는 소리라도 들을까봐 매우 조심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딸아이는 자기 자신은 정말 별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드러내는 게 더 싫었다고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듯 너도나도 ‘중매’를 자처하고 나섰다고 한다. 집이 어디냐 부모님은 계시냐 나이는 얼마냐 사귀는 사람은 있냐.......

소위 말하는 ‘사(士)’자를 들먹이며 은근히 접근을 해서 기겁을 하고 나왔다고 한다.

나이는 이제 막 결혼적령기에 이르렀지만 아직은 결혼은 남의 일이라고 여겨왔던 딸아이의 그 놀란 가슴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웃어넘긴 그 얘기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딸아이가 혼자서 보아둔 집을 보기 위해서 며칠 뒤에 다시 다른 부동산을 찾은 우리 내외는 거기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집을 보러온 중년의 여인이 딸아이의 직업이 교사라는 걸 알자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시시콜콜 파고 물어왔다.

“우리 아들은 서른인데요. 유학도 다녀왔고 박사학위도 받았고 키도 178이고 인간성은 KS 마크가 붙었어요. 지금 기업 경영 컨설팅을 하고 있는데............결혼만 하면 아파트도 준비되어 있고....” 그 아낙의 아들자랑은 계속 이어졌지만 난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라도 잘 사귀어서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 난 기가 질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떤 신사분이 넌지시 던지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주머니, 아들이 판검사 아니면 명함 내밀지 말아요. 요즘 여교사 며느리 보기가 어디 만만한줄 아시우?”

집을 계약 한 뒤 얼굴이 벌게지는 딸아이를 앞세우고 부리나케 그 자리를 나왔지만 입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노골적인 그들의 욕심에 새삼 혀가 내 둘러졌다.

교사라는 직업 하나만 보고 앞뒤 안 잰 경솔함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오죽하면 그리할까를 생각하니 불쾌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너무나 치열하고, 바늘귀 같이 좁아터진 구직난이 여교사의 입지를 하늘 끝까지 올려놓았다.

딸아이에게 교사를 권한 건 우선 적성에 맞아서 그랬고 여자직업으로서는 그리 홀대받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난데없이 ‘일등 신부감‘ 운운 하는 건 너무 뜻밖이었다.

딸아이를 가지고 유세 부릴 일도 거드름 피울 일도 어깨 힘줄 일도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험한 세상 안에 세워 두는 게 불안하고 걱정이 앞서기만 했다.

아직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는 딸아이의 심성에 혹시라도 생길 실금에 겁이 났다.

땅만 보고 걷고 있는 딸아이에게 귀에 쏙 들어가는 당부를 했다.

“너 어디 가서든지 네 직업 밝히지 마라”

대답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마 내 의중을 이미 눈치 채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너 쥐도 새도 모르게 보쌈 당 한다. 내 말 명심해라”

난 간절한 맘으로 찔러 주었는데 딸아이는 웃기만 한다.

“이것아 농담 아냐, 여긴 촌이 아니고 서울이다. 네 코 간수 잘하고”

뒷말은 농담으로 들어도 좋으나 앞엣말은 제발 새겨 들어라고 신신 당부 했다.

남편도 내 말에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필요이상으로 신경 곤두세우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딸아이도 덩달아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세상 물정에 무르기만 한 아이에게 너무 부정적인 면만 찔러 주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일에는 아직 자기 앞가림에 익숙치 못한 것 같아서 노파심으로 일러 주었다.

아무리 서울멀미 지독하게 하는 나 이지만 아이들 둘이 다 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 이제부턴 고자 처갓집 드나들 듯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서울멀미도 치료하고 딸아이 코 간수도 해 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