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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암, 할 수 없네
BY 蓮堂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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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저녁 먹고 들어온다는 말을 저녁 시장을 다 보아 놓은 뒤에 알려 와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나 혼자 먹을 밥을 지지고 볶고 하자니 번거롭고 귀찮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충 챙겨 먹으려고 씽크대 위에 놓은 냄비들을 뒤져 보았지만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우리네 식습관은 찌게나 국이 있어야 먹은 것 같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데 찌게거리 파 다듬고 양파껍질 벗기고 마늘 찧어서 냄비에 앉히려니까 괜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 까이꺼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중국집에 전화를 했다. '대단히 죄송한데요.........자장면 한 그릇만..............' 말이 채 끝을 내기도 전에 한 그릇은 배달이 안 된다고 날씨만큼이나 쌀쌀맞은 배 부른 거절에 주려있던 배가 더 얇아지는 것 같았다. 분식집에 전화를 해도, 체인점에 전화를 해도 일정금액 이상이 되어야 배달이 된다고 한다. 할 수없이 냉장고를 뒤졌지만 달랑 남은 두식구의 입을 위한 어떤 간식거리도 마련되어 있질 않았다. 나나 남편은 주전버리를 좋아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며칠 북적대다 간 아이들과 조카가 싹쓸이를 하고 나서 그 자리를 미처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용도실에 있는 고구마도 씻어서 쪄야 하는 수고가 맘에 안 들어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덮어 두었다. 사과상자가 보였지만 과일은 어디 까지나 후식이지 배를 채울 주식은 아니잖은가..... 전자레인지 위에 비스켓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오히려 입을 달궈 놓아서 밤새도록 물을 들이켜야 할지도 모른다. 냉동실에 있는 만두가 눈에 띄어서 반가운 마음에 겉봉에 씌어진 유통기한을 보니 '2005년 11월 24일까지'라고 되어있다. 아뿔싸! 이게 그동안 왜 그렇게 눈에 안 띄었지? 아까워서 먹으려니 찝찝하고 버리자니 3000원을 그냥 버리는 것이 되고........ 대책도 없이 도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말하자면 더 썩혀서 버린다는 결론이다. 냉동실 한쪽 구석에 둘둘 말린 검은 봉지가 눈에 띄어서 펼쳐보니 기억에도 없는 웬 떡 뭉치가 돌보다도 더 딱딱하게 얼었는지 말랐는지 구분이 안 가는 상태로 제조일자도 모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게 언제적 물건이냐.......... 또 도로 밀어 넣었다. 냉동실이 문 열면 발등 찧을 정도로 복잡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한심한 살림 솜씨에 와락 짜증이 났다. 팔을 걷고 냉장고 분해에 들어갔다. 바닥에 꺼내놓은 음식이 안에 들어 있을 때보다 곱절은 많은 것 같다. 한 시간을 끙끙대며 그동안 소홀했던 살림에 대한 죗가를 톡톡히 치루고 나니 허기가 져서 허리가 반으로 접히는 기분이다. 풍요 속에 빈곤이란 말이 무릎 치도록 구구절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굶고 그냥 자기엔 남아있는 밤 시간이 너무 긴 것 같다. 뭘 먹어도 먹어서 한 끼 건너뛰는 억울함만은 면해야 하겠는데 마땅한 게 생각이 나질 않아서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아파트 상가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입맛을 잡아당기는 게 없다. 떡볶이는 평소에도 깔끔치 못한 주인 아낙의 고춧가루가 의심스러워서 못 사먹겠고 어묵은 국물이 너무 탁해 보여서 싫었다. 오늘따라 잉어 빵 아주머니의 포정마차는 천막이 둘둘 말린 채로 휴업한 상태다. 분식 체인점까지 10분 이상을 걸어가느니 차라리 굶는 게 나을 만큼 날씨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 빵집에 가니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아무리 불러도 기척이 없다. '십 년 수절에 만나고 보니 고자라더니...............' 길지도 않은 짧은 내입을 채워줄 게 이렇게도 귀할 줄 몰랐다. 행인도 뜸한 길거리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할 수 없이 슈퍼로 발길을 돌렸다. 느끼해서 입에서 떼어 버린 지 오래지만 오늘 만큼은 할 수없다.
'아저씨.............라면 한 봉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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