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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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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자식도 자식이거늘


BY 蓮堂 2005-08-22

 

친정 부모님을 모시러 가는 맘이 웬 지 찜찜하고 고개가 자꾸만 갸웃거려 졌다.
아버님 성미에 선뜻 딸을 따라 나선 다는 게 영 미덥지도 않아서 '그러지 뭐'라는 말뜻을 허락으로 해석해 버린 내 귀를 한 번 더 의심을 해야 했다.
부모님 병 수발에 지쳐있는 오라버님 내외의 짐을 잠시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부모님을 당분간 내 집으로 모시고자 했을 때 순순히 승락을 하신 아버님이 무척 고마우면서도 한구석 긴가민가로 내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평생을 당신 집 울타리 밖에서 묵은 적이 없는 아버님도 세월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이 변하셨다는 다행스러움에 장차 내가 겪어야 할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도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 성(性)적인 차별이 아닌 - 로 여태껏 자식노릇 한번 변변히 못했었는데 이 기회에 내 체면도 세우고 싶었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효도도 하고 싶었다.
딸은 출가외인이므로 친정 일에 끼어들지도 말 것이며 친정 출입은 될 수 있음 잦지 말아야 한다는 고루한 사고의 대물림으로 인해서 그동안 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경조사에도 말참견은 될 수 있음 하지 말아야 했고 이유 없이 오랜 시간 친정에 머무는 것도 마땅치 않아 하셨다.
시집얘기 미주알고주알 퍼 옮겨 오는 것도 용납 안 하셨고, 그저 딸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무소식으로 살아주길 바랬던 아버님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딸네 집에 가시는 걸 거의 금기시 하셨다.
내가 결혼 한 지 24년이 되도록 내 집에 딱 두 번 걸음 하셨는데 한번은 내 신행 때 나를 데리고 오셨고 또 한번은 아파트 입주했을 때 격려차 잠시 오셔서 점심 드시고는 벌에 쏘인 듯이 총총히 가셨던 아버님이셨다.
딸네 집에 친정부모가 머문다는 건 꼴 볼견이고 되어먹지 못한 사람이나 할 짓이라고 하셨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딸네 집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친정부모가 할 도리고 사돈집과 뒷간의 간격은 멀수록 좋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몇 대를 흘러 내려와도 요지부동으로 굳어 있는 아버님에게 오래전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너무나 서운한 나머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거꾸로 필름 돌리고 계시냐고 예전에 아버님께  따진 적도 있었다.
내 말에 대답 대신 허허로운 웃음으로 은근슬쩍 눙쳐버린 아버님의 저린 가슴을 그때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우매함으로 가끔씩은 눈시울 붉히기도 했다.
품안에 껴안지 못하고 멀찍이 밀어내야만 하는 딸자식이었으니.........

부모님이 못 다 품은 정을 이제는 반백의 내 가슴으로 안아 드리고 싶어서 겨우 받아 낸 허락이 펑크 날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친정 길에 올랐으나 오지마라는 올케의 암시에 가슴은 발치께로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냈다.
역시 내 짐작은 한 치도 비켜가질 않았다.
없었던 걸로 하라는 올케의 당부를 무시하고 친정에 갔더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 잠시 빌려다 놓은 휠체어를 저승사자 보듯이 진저리를 치시면서 예전의 그 말뚝 같은 땅고집을 한 치도 꺾지 않으셨다.
자식 집을 전전하는 초라한 노인네로 전락했다는 위기감을 느끼셨는지 정신이 맑지 않은 아버님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평소의 그 대쪽같고 칼끝 같은 성미가 되살아나서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무리 달래고 사정하고 애원을 해도 요지부동인 아버님이 미워서 내속은 속이 아니었다.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던 남편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혀를 내 둘렀다.
아버님이 변하셨을 거라는 착각에 대한 울화로 인해서 목청도 덩달아 높아졌지만 홀 낏 쳐다보시는 회색 동공 속에는 절망감 같은 빛바랜 색깔이 너울거리는 것 같아서 가슴이 뻑뻑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렇게도 당신 몸 하나 추단 못 하시는 나약하고 짐스러운 모습으로 내 앞에 계셔야 하는지, 예전의 그 서릿발 같던 시퍼른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분하고 안타깝고 억울한 심정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딸의 마음도 이러한데 아들 며느리 속인들 오죽하랴.
긴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반의 반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질녀의 산(産) 바라지와 부모님의 수발에 한계를 느낀 오라버니 내외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리 딸이지만 나도 자식인데 출가외인이라는 핑게로 팔짱끼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안쓰럽고 절박한 상황이었다.
얼떨결에 허락을 하신 아버님은 당신의 기억엔 없는 일이었나 보다
오른손을 두 어 번 강하게 내 저으면 번복이라는 게 없는 아버님 특유의 거부 제스쳐는 커 오면서 숱하게 보아왔던 무시무시하고도 눈을 감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지금껏 가족의 뜻은 거의 받아준 적도 없이 일방적인 잣대로 살아오신 분이시다.
아홉 살 때 할아버지를 여윈 아버님은 홀로 서기에 익숙하고 길들여지다 보니 당신 위주로, 당신 뜻대로 펼 수밖에 없었던 잊고 싶은 과거사가 여든이 넘도록 몸에 달라붙어 있었던 거였다.
그 꼿꼿하시고도 흔들림 없는 태산 마음으로 우리 육남매를 엄하게 키워 오신 은혜는 살면서 뼈아프게 느끼지만 이젠 한 귀퉁이 수그러뜨리고 사셨으면 하는 맘이 원망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끝 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하지 말아야 하고 모래땅에 혀를 박고 죽는 한이 있어도 딸네 집에 얹혀사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된다는 게 아버님 머릿속에 박힌 관념이었다.
그런 분에게 딸네 집을 운운 했으니 결과는 여드레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 갈 소리였다.
예전부터 ' 아들 밥은 누워서 받아먹지만 딸 밥은 서서 얻어먹어야 한다'는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고스란히 당신의 자리에 박아 놓았으니 성급하게 받아낸 허락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빈차로 돌아오면서 자꾸만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저 자리에 모시고 갈 줄 알았는데 야속하고도 서운한 맘이 떨쳐지지 않았다.
부모님을 위해서 내가 쓰는 안방까지 다 비워놓고 왔는데................
차가 유난스럽게 털털거리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