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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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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출했던 여자?


BY 蓮堂 2005-03-27

남편은 나를 보고 가출의 경력이 있는 전과자라고 은근히 깎아 내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난 가출이 아니고 잠시의 외출이었다고 반박을 해야 했다.

남편이 가출이라고 우기는 것도 내가 집을 나갔다는데서 비롯되었지만 난 집을 나간 게 아니고 잠시 바깥에 돌아다니고 왔다고 끝끝내 맞서서 내 입지를 지켜야 했다.

아직도 남편은 코너로 몰릴 일 있으면 껌 씹듯 이 hiddn card로 내 야코를 죽이려 들었다.

처음엔 발끈거렸지 만 세월이 흐르니까 나도 느물거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나 가출했던 여자유..그래서..가출한 여자 델고 사는 당신도 벨 수 없네 머..'

 

그 가출(외출)의 전모는 지금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바깥 行이었다고 스스로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 시켰다.

남편의 나이 한창 젊었을 삼십대 중반에 집보다는 바깥이, 가족보다는 친구가 더 좋았던 때다.

한달 봉급 중 절반의 절반을 생활비로 뚝 잘라서 나에게 던져주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남편의 주머니 속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녹아 없어지는데는 일주일도 안 걸렸다.

그때만 해도 순둥이 일 수밖에 없는, 주변머리 소갈머리 다 맘속에만 쳐 박아두고 그 흔한 바가지 한번 긁지 못했던 때였기에 지출의 용도를 물을 용기조차도 없었다.

안 봐도 뻔했던 남편의 지출은 주로 술 마시고 고스톱 치면서 남의 주머니 부풀려 주는데 일조를 했다.
 마누라는 콩나물 500원어치도 벌벌 떨면서 사는데 남편은 눈알만 한 술잔에다가 기천원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고 밤새도록 무릎고비 주물러가며 동양화 그림에 빠져서 그야말로 고스톱의 4대원칙 -  현금 박치기, 안면몰수, 가사불문, 뒷말없기 - 을 착실하게도 지켰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아침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날이 당직인데도 불구하고 교대시간이 한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는 전날 밤 숙직자의 전화를 받고 보니 황당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편은 그 날이 당직이라는 거 조차도 잊어버리고 전날 아침 출근 한 이후로 만 하루가 지났지만 소식이 깡통이었다.
 좁은 소견에 이일을 빌미 삼아 짤리거나 징계 먹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지만 지금같이 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변변치 못한 주변머리로 남편이 있을만한 곳의 전화 번호를 알고 있을 리 도 없는 암담한 상태로   한 군데 짐작 가는 곳으로 전화를 했더니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어디 한번 알아보겠다는 야릇한 뉘앙스를 풍긴 뒤 전화는 끊기었는데 남편에게서 금방 전화가 왔다.

"머야 ??....머..왜 전화해서 사람을 찾고 그래?"

도둑놈이 몽둥이 들고 대 드는 꼴이란....

당직 아니냐고 쏘아 부치니까 알아서 다 조치했으니까 신경 끊으라고 했다.

그리곤  조금 있다가 들어 갈 거라는 믿지도 못할 소리로 날 진정 시킬려고 했지만 한 두 번 겪고 한 두 번 속았냐.

남편은 그 날 밤 9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짐작은 했지만 이젠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대로 물에 물 탄 듯 싱겁게 넘어갈 일이 아니고 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미치자 난 '가출'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엄포용이 아니고 정말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더 이상 남편하고 살 맞대고 산 다는 게 내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꺼번에 목줄을 누르고 치밀어 올랐다.

당시에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두 아이의 잠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남편이라는 인간을 안 보고 싶었다.

얼굴을 대하면 모질지 못한 내 소갈머리가 연기 풀어지듯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아서 마음 옹골차게 먹고 대문을 나섰다.

아이들 생각에 뒷 꼭지에 실 매단 것 같이 자꾸만 고개가 뒤로 젖혀졌지만 이왕 빼든 칼 속시원하게 한번 휘두르고 나면 남편도 정신을 차릴 것 같은 나 혼자만의 생각에다가 결론까지 내었다.
 우선 늦은 시간에 집이 비어 있으면 - 절대로 그 시간에 나들이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내가 없어진 이유를 짐작해서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 할 것이지 만 마땅히 짐작 가는 곳도 없을 것이다.
 밤새도록 들어오지 않는 마누라 생각에 자기 잘못을 뉘우칠 것이며 엄마 찾아 난리 치는 아이들 달래느라고 잠도 못 잘 것이다.
그 전날 밤샘 한 것까지 합치면 아마 잠이 쏟아져서 손을 자르고 싶도록 후회와 미안함으로 날 기다릴 것이다.
출근 직전에 '짜 잔~~~' 하고 등장하면 남편이 반가움과 미안한 맘으로 나에게 엎어 질 것이다.
 그러면 난 여유 만만하게 남편의 덜미 잡아채서 무릎을 꿇릴 것이다.
 아..생각만 해도 통쾌 유쾌 상쾌의 경지를 맛 볼 것이리라.

 여기까지 각본이 완성되자 난 망설임 없이 우산을 받혀 들고 무작정 버스 터미널로 내 달았다.

시어른들이 계시는 곳으로 갈려고, 가서 그 동안의 남편의 비리 일일이 꼬아 바치고 처분을 기다릴 겸해서 막차 표를 끊었다.

내가 시댁으로 갈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자가 집을 나가도 시댁 쪽으로 가면 흉이 되지 않고 아군을 만들 수 있는 잇점이 있다는 걸 노렸다.

자칫 친정이나 친구 집으로 간다면 사건이 단순하게 넘어가질 않고 정말 가출한 게 되어 버린다는 거다.

여자는 이래저래 서러운 신세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틀에박힌 관념, 즉 여자는 문지방 넘으면 요단강 건너간 듯이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고 만 죽은 여자 취급했다.

여자를 바람든 무에 비유했고, 내돌리다 깨어진 그릇처럼 금간 여자 취급해 왔다.

아이들 걱정 집 걱정에 버스 표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옛말에도 집 나가는 년이  보리방아 찧어놓고 나가냐구 스스로를 닦달했지만 아이들이 자다가 깨서 울고불고 하면 어쩌나...

작은 놈은 자다가 아직은 소변을 누게 해줘야 하는데...

나를 찾다가 없으면 아이들이 얼마나 놀랄까.

두 아이는 자다가도 나를 꼭 확인하고 다시 잠드는 버릇이 있는데....

발목을 잡는 아이들의 눈빛을 생각하니 도저히 버스를 탈수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맘으로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받는다.

이젠 안심이다. 설마 제 자식 하나 건사 못 하려구....

아뭇 소리 안하고 끊었지만 남편은 아마 난 줄 알 거다 . 그 정도로 둔하진 않으니까.

그동안에 막차 버스는 그냥 달아나 버렸고 난 갈데 없이 터덜터덜 시내를 돌아 다녔지만 이미 인적도 끊기고 마땅히 갈곳도 없었다.

심야 극장엘 가려고 했지만 지독한 근시라서 자막 처리된 외화를 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고, 그러고 보니 번개탄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연탄불이 꺼지면 냉방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난 시치미 딱 떼고 얼굴에 철판 깐 채 연탄불 갈고 그냥 부엌에 앉아 있었더니 남편이 얼굴을 들이밀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뛰어야 벼룩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리곤 다시 나가라고 하면서 제법 독재자의 흉내를 내기에 이르렀다.
반성의 빛은 눈꼽만큼도 없이 오히려 잠시 집을 비운 나에게 가출했다고 덮어 씌웠다.
가출하는 년이 달랑 우산하나 가지고 나가는 것 봤냐고 대들었지만 일단 아이들 팽개치고 나갔으니 가출이라고 턱도 없이 우겨대었다.

몇날 며칠을 가사 팽개치고 밖으로 나 돈 남자 보다도 몇시간 아이들 놔두고 밖에 돌아다니다 온 여자의 죄가 더 무거울수 밖에 없는, 무게 중심이 남자에게로만 쏠려있는 사회적인 잣대에 여자는 여전히 약자이고 죄인이었다.
내 각본이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거동은 잠시 주춤 거렸지만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여전히 하던 대로하고 다녔다.
결혼하고 10여 년을 그렇게 남편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동서남북을 휘젓고 다녔다.
나이가 들고 힘이 달리니까 이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친구보다는 가족을 챙기는 착실한 가장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남편에게 난 '가출했던 여자'로 딱지를 여전히 이마에 붙힌 채 살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