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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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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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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


BY 蓮堂 2005-01-26

한 노처녀가 노총각하고 맞선을 보았다.

마주앉은 남자는 수더분하고 넉넉해 보였다.

말수가 적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딱 부러지는 반듯함도 보였다.

탐이 나는 남자였다.

결혼하고 싶었다.

여자가 가족이 몇이냐고 물었다.

어무이하고 남동생 하나라고 했다.

단촐하고 별 흠이 없을것 같아서 여자는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집에서의 생활이 시작 되었는데 시어머니는 끼니때만 되면 슬며시 사라지는것이었다.

처음엔 화장실 갔으려니 했는데 매일 거듭되는 시어머니의 행동에 의심이 갔다.

남편에게 물으니까 모른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직접 물으니까 묻지 마라며 화를 내셨다.

점점 더 이상했다.

 

그래서 하루는 몰래 뒤를 밟았다.

시어머니는 소반에 밥을 담아가지고  뒤곁에 있는 골방으로 가는거였다.

몇번 기침을 하니까 안에서 괴성이 들렸다.

시어머니가 골방으로 들어가고 난뒤 며느리는 문밖에서 바짝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 얘깃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시어머니의 소리일뿐 밥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며느리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날 밤 며느리는 모두들 잠든 시간에 그 골방으로 가서 기침을 했다.

그 괴성이 또 들렸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던 며느리는 비명을 질렀다.

어두컴컴한 골방엔 누군가가 있었다.

 

다음날 온 식구가 모였을때 며느리는 용기를 내어서 말을 꺼냈다.

그 골방에 대한 얘기를 들려 줄 것을 요구했다.

시어머니는 앞섶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들 삼형제중 막내였단다

태어날때부터 온 전신이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단다

죽어라고 포대기에 싸서 버리고 온것만 해도 여러차례 였지만 명이 긴지 그럴때마다 질기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처음에는 한방에서 키웠다.

그런데 맏아들이 혼기가 차서 장가를 보낼려고 하니까 이 막내 때문에 번번이 깨어졌다.

다행이 작은 아들은 이 흠을 숨기고 장가를 보낼수 있었지만 맏이는 숨길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집에 살아야 하는데 숨긴들 감춰지지가 않을것 같았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밝히니까 모두들 달아나더란다

 

맏이가 훌쩍 서른을 넘기다 보니 애가 탄 어머니는 이 막내를 감추기로 했다.

골방에다가 감춰놓고 아들 둘 있는 행세를 해야 했다.

맏이가 결혼을 하고 한집에 살다보니 어머니는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딛는것 같았단다.

이제 며느리가 알았으니까 분명 도망을 칠거고.........

 

그날 며느리는 그 막내를 햇볕이 잘드는 시어머니 방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어무이요...이런 사람은 사람도 아닝교?..........참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니더....."

도망갈 줄 알았던 며느리는 그날부터 시동생을 거두기 시작하는데 홀딱 벗겨서 목욕시키는건 물론이고 이발까지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

 

짧은 명줄을 타고 난 시동생은 형수의 극진한 바라지에도 불구하고 햇볕 본 지 일년도 안되어서 세상을 떴다

며느리가  제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시집 동네에서 일어났던 실제 얘기다.

장애자 복지관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나니 문득 이 얘기가 떠 올랐다.

 

우리나라의 장애자 숫자는 정확하게 얼마인지 나와 있지를 않다고 한다.

그 첫번째 이유가 드러내놓고 신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중에 누군가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크나큰 흠이라고 생각하는 고루한 관념은 시대가 바뀌어도 스러지지 않는다.

누구든 후천적 예비장애인이다.

난 별탈없이 잘 살거라는 장담은 어느 누구도 보장 할수 없는 가파른 현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도 삐딱하다.

선뜻 다가가서 먼저 말 붙히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을 하는 장애인을 만난 건 몇년전이었다.

공공기관에서 서투르게 배운 미용솜씨를 가지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이발 봉사를 나갔었다.

 

가위와 바리깡으로 내딴에는 등어리 땀이 흐르도록 머리를 만졌지만 엉망이었다.

결국엔 같이 간 회장이 마무리를 하였지만 미안해서 난 고개를 들수 없었다.

앞을 볼수 없는 사람일수록 더 반듯하고 얌전하게 깎아 주어야 하는데 내가 섣부르게 가위를 쥐었나부다.

 

그때 그 사람이 나를 보고 그랬다.

"우리같은 병신하고는 말도 안 섞을려고 하는데 머리까지 만져 주시는데 아무렇게나 깎으면

어때요.......그냥 댕기 안땋을 정도만 잘라 주시이소."

그리곤 호탕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현대중공업에 다니다가 교통 사고로 양쪽눈을 실명한 후천적 장애인이었다.

나하고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가질수 없을 만큼 사리가 분명했다.

왠지 정상인이라는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 뒤로는 장애인을 위한 이발 봉사는 더이상 나가지 않았다.

 

식판을 들고 어린 장애자에게  갖다 주었을때 좋아라 괴성을 지르던 남자 아이가 생각났다.

작년 여름엔 보이더니 보이지 않았다.

왠지 한구석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나쁜일로 자리를 비우진 않았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못을 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