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 버린다는 것…….
털어 버리고, 벗어 던지고, 한 켠으로 밀어 두고 그 접힌 부분에 대해서 잊고 산다는 것은 꽤나 섭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씩 들춰내어 그 시간을 담담하게 얘기 할 수 있다면 접혀버린 시간에 대한 일말의 후회나 아쉬움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5년 넘게 내 생활의 반 이상을 쏟아 부었던 내 생활 공간을 접어 버렸다.
5년 전 가을빛이 명주실같이 가늘게 찢어져 내리던 날, 아파트 단지 안에 비어있던 약국 셔터에 '세줌'이라는 글자가 자석같이 나를 잡아 당겼다. 거국적인(?) 사명감으로 가족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일을 벌렸을 때의 그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불안함에 후회도 따랐고 오기도 생겼다.
실속 없이 새어나간 돈 때문에 어려웠던 경제적인 여건도 한몫 했지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 시간들에 대한 보상심리도 작용했고 닫혀진 공간을 색다르게 열어보고도 싶었다
이왕이면 돈도 벌면 더 좋았고…….
'분식집 아줌마'
이게 지난 5년 간 나에게 따라붙은 닉네임이었다.
2, 3 년만하고 그만 두리라는 애초의 각오와는 달리 5년 넘게 붙들려 있었던 건 금전적인 욕심이 아니고 어느덧 물들어 버린 사람 내음에 도취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작지만 편안하고 내가 움직이기에 전혀 불편하거나 옹색하지 않았기에 난 그 작은 공간에 애착을 가졌었고 넘치는 애정을 쏟았다.
드나드는 사람들과 눈 맞추며 나누는 인사에 스스로에게 '넌 참 행복해'라고 했다.
동전 내미는 꼬마의 작은 손을 잡으며 '몇 살이야?'라고 물었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아줌만 몇 살이야?'라고 똘망똘망한 눈망울 굴리며 내 나이를 물어보던 키 작은 여자 애를 들춰 안았었을 땐 정말 행복했다.
학원 땡땡이 치고 하릴없이 내 가게에 죽치고 앉았던 여중생들을 '학원 들어가라고' 하면서 호 되게 나무라서 쫓아낸 적이 있었다
'아줌만 참 특별해요…….'
빤히 쳐다보고는 잽싸게 학원으로 들어간 그 단발머리 여학생도 잊혀지지 않았다.
한가한 시간에 마주한 책과 음악은 나를 버틸 수 있게 한 에너지였다.
찾아온 친구와 차 한잔 나누며 살아가는 얘기에 빠져서 오는 손님에게 건성으로 대했던 건 상도에 어긋난 실수였지만 웃음으로 만회한 뻔뻔한 여자이기도 했다.
지난 5년 간 계층을 가리지 않고 대해 왔던 숱한 사람들과 조그마한 마찰이나 이맛살 찌푸리는 일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최대의 자랑이었고 긍지였다.
물론 최선을 다했고 나를 찾아준 그 많은 사람들도 나에 대해 참으로 깍듯했다. 나보고 전직 교사였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건 잘못을 하는 아이들을 거침없이 나무라고 칭찬해주고 마치 교사가 제자들 다루듯이 그렇게 대해준 게 그들이 그렇게 묻는 이유였다. 나름대로의 사고와 지식을 앞세워서 뻣뻣하게 나를 대하던 도도한 아이 엄마가 어느새 내편으로 돌아서서 '언니'라고 불렀을 때 난 이 일에 뛰어든 보람을 느꼈다.
심한 욕설을 하던 아이를 나무랐더니 이 아이 엄마가 나를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었다.
'당신이 뭐냐…….분식점 여자 주제에…….'
다분히 무시하는 그 표정에 난 진정으로 걱정이 담긴 충고를 했다.
'내가 걱정이 아니고 앞으로 당신이 걱정이요....'
차 한잔 나누며 속살같이 드러낸 그 아이 엄마의 솔직한 고백에 우리는 친해졌다.
'면목 없고 미안하다…….'는 조아림에 난 민망했지만 뭔가 가슴이 꽉 찬 느낌도 받았었다.
아파트 단지 안이라서 쉽게 배달도 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배달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를 재워놓고 왔다고 하면서 음식 재촉을 하기에 갖다 준다고 했더니 기겁을 했다.
"어떻게 아줌마 같은 분을 부려먹어요..미안해서 못 그래요……."
"전 장사꾼인데요……. 당연히 제가 해 드릴 서비스입니다"
"그래도 아줌만 안 되요..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손사래를 치면서 한사코 기다렸다가 가져갔다.
듣기에 따라서는 나를 업그레이드시킨 것 같지만 장사치한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내 본업이 완전히 무시되고 상실 당한 것 같았다. 그 말이 내내 맘을 편케 하지 않았던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답다.' 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에 어울리고 그에 합당해서 넘거나 모자람 없이 아귀가 맞을 때 쓰는 말이다.
내가 이일을 하고 있을 때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사꾼답지 않다는 거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장사꾼은 반들반들하게 닳아빠지고 약삭빠르고 계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리숙한 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여겼는지…….
'이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 한 것 같다'
'이런 일 하기엔 아까운 사람이네…….'
이 일은 나에게 맞지 않다는 말과 동시에 끼워 넣은 말은 오래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추측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쯤 그만 둘 거냐고 은근히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고 닳도록 할거라는 내 말을 곧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개월만에 백기들 줄 알고 어렵사리 허락 해 준 남편마저도 내 주변머리를 가지고 5년씩이나 버틴 게 장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나의 어떤 부분이 뭇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심어 주었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내 의도와는 사뭇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 일을 그만둔다고 거래처 주인하고 얘기했을 때 그 사람 말이 걸작이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언제쯤 그만 두시나 날짜 꼽고 있었습니다."
껄껄 웃으며 축하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어울릴 것 같으냐고 짓궂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권한 직업 중 가장 많은 게 '뮤직 카페'와 '서점' 그리고 직업적인 '카운셀러'와 '교사'였다.
가게 분위기에 울리지 않게 한쪽 벽면이 음악 테잎과 시디 그리고 책으로 진열되었으니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셈이다. 내가 항상 책과 음악을 가까이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정말 이게 내일이 아닌걸 내가 하고 있는가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이런 착각은 일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거 알지만 불쾌하게 듣거나 오만을 부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속물 건성에 고명을 뿌려주는 그 말들을 조화 있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게 또한 내 몫으로 남아 있음을 알아야했다.
세인들이 생각하는 '분식점 아줌마'의 이미지는 넉넉한 인상과 수더분하고 조금은 땟국에 절인 듯한 그러면서도 가끔은 하품해대며 나태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다. (그들을 비하시킬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렇게 하면 대하는 사람이 더 편안하고 만만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래도 난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는 인상은 아니었고 나에서 풍기는 그 이미지는 손님들 입맛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부다.
'왜?'라는 의문점은 여전히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의문부호이다.
그 의문점 안에 슬며시 가미되는 건 나의 가정사에 은근히 관심을 가지는 거였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하등의 이런 장사 할 이유가 없다는 게 그네들의 편하게 생각하는 결론이었다. 아직도 이런 장사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경기가 어려워져서 이제는 손쉽게 소자본으로 누구나 - 나이, 배움이나 지식, 외모 등등을 무시한 -시작할 수 있는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손바닥만한 이 지방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는 후퇴하고 있었다.
직업에 대한 편견이나 고루한 생각이 대물림하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하다.
내가 장사꾼답지 않아서 더 이상의 발전이 없어 이 일을 접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난 5년 간 여기에 투자한 시간만큼 빼앗기고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았다. 하고 싶었고 해야 할 일을 접어둔 채 이 일에 시간과 정열을 몽땅 쏟아 부은 게 차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새 이 일에 대해서 조금씩 물러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쉬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는가 하면 만사에 느려지는 둔함도 보였다.
어느 날 나 자신을 돌아보니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너무 허무하다는 결론을 내린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이 일을 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배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겁 없고 경험 없이 뛰어든 장사에 처음엔 발등 찍도록 후회를 했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예전의 민원창구에서 대하던 그 사람들하고는 목적 자체가 틀리다보니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시간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실수했을 때는 손님으로서의 질책이 아닌 따뜻한 이웃으로서 이해하고 배려 해 주었던 게 가장 고마웠다.
장사꾼으로서의 나를 대한 게 아니고 살가운 이웃으로 보아준 따뜻한 그 눈길들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일을 함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눈높이 처세술에서부터 눈빛 하나 토씨 하나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보다 더 더 중요한 건 상도를 잃지 않은 것이 정직과 성실이라는 것도 배웠다. 무엇보다도 일면식도 없었던 많은 사람들과의 그 끈끈한 인연이 참으로 소중한 나의 재산으로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을 알았고 일약 이 천 여세대 안에서는 공인 아닌 공인으로 자리 매김도 했었다.
그러기에 어느 장소 어디를 가든 내 입지가 그리 자유롭지 않은 불편함도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 남은 음식 몽땅 공짜로 퍼 돌리는 나를 보고 꾀 없는 아이들 '아줌마 짱'이라고 엄지손가락 들어 올렸을 때, 희뿌옇게 흐려오는 내 눈을 아이들이 보지 못해서 다행스러웠다. 일렁이는 내 눈물 속에 이 아이들을 다시 넣어둘 수 있는 날들은 이제 없을 것 같다
마치는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난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다음에 인수할 사람이 혹시라도 서글퍼 하거나 낯설어 할까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렇게 쓸고 닦았다.
법정 스님의 수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스님은 어디서 살든 떠날 때는 다음 사람을 위해서 항상 깨끗하게 도배하고 장판을 새로 깔았다고 한다. 그게 새로 오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도리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남아있는 생 중에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젊고 활기찰 것 같다.
나를 위해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일초라도 앞당기고 싶은 욕심이 어느 사이 나를 한계점으로 몰고 갔다.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반대와 우려와 반신반의로 지켜보던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며 반겼다. 특히 교사 발령을 앞두고 있는 딸애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았다.
"엄마 고생하셨어요……. 진작에 말렸어야 했는데요. 이젠 엄마 하시고 싶은 거 뭐든 하세요. 돈은 제가 다 대드릴게요."
콧등이 시큰거렸다. 마치 오랜 시간 밖으로 방황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탕아를 반기는 듯한 가족들의 그 애정 어린 환대에 그동안 소홀했던 가정사에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제시간에 제대로 끼니 옳게 챙겨주지 못했던 남편에게 제일 미안했다.
수시로 통화 가능한 무심한 군바리 아들녀석 마저도 나를 다독여 준다.
"엄마, 우선은 허전하시겠지만 이젠 다 털고요 힘내세요. 화이팅!!!!"
‘이제부터 난 무엇을 해야 하나…….’
머릿속은 숱한 프로그램으로 바늘 꽂을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가입한 문협에 열심히 참여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결실도 보고싶은 욕심도 있다. 그리고 그동안 소홀했던 운동과 미루어 두었던 서예도 손을 대고 싶고, 내가 소속된 장애인 복지단체에서 일하자면 호스피스 교육도 받아야 한다.
백조의 날개 짓으로 더 먼 곳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도 어느 한적하고 깨끗한 강가에서 피곤한 날개를 접을 수 있다면 난 모든 힘을 날개에 실을 것이다.
벗어버린 데 대한 홀가분함이 있는가 하면 실감나지 않은 지난 5년 간의 그 여운과 흔적이 쉽게 씻기어 질 날은 아직도 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