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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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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날의 단상


BY 蓮堂 2004-06-29

작가 : 그린미
 

밤마실 간다고 나선 걸음이 어느새 어둠이 쏟아지는 강둑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으르릉 거리며 하늘을 가르던 천둥이 예사롭지 않더니
이내 천지를 태울듯이 번개가 사방으로 내려 꽂혔고
뒤이어 토해내는 장대비에 온 전신을 내 맡길수 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흠씬 두들겨 맞는 이 짜릿함이 싫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 스물스물 기어 들어가는 빗줄기가 좀 더 거세었으면 했다.

온몸에 달라붙은 츄리닝이 볼썽 사납게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노출이 되었다.
미친듯이 휘적거리며 거리를 가로 질렀다.

이런날은 모든걸 거꾸로 엎어서 비와 함께 쏟아내고 싶어진다.
목구멍까지 기어 오르는 울컥거림이 내내 심사를 어지럽힌다.

그 울컥거림이 뭔지를 알아 내는데는 하루가 걸렸다.
그것이었다.

 Identity.......정체성

나의 정체성은 조금씩 탈색되어 가고 있었고
운명의 바퀴가 조금씩 틈을 보이면서 다가올 그림자를 겁내고 있는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중심을 잡아주는 축의 견고함이 비틀거리며 내내 흠집을 내고 있었다.

달팽이 고리관의 이상으로 중심을 잡을수가 없다는 핑게를 대고 싶어진다.
하늘이 돌고 바닥이 위로 튀어 오른다.
나무가 쓰러지고 집이 무너지고 나자신도 자꾸만 바닥으로 기어다니고 있었다.

바닥을 뚫고 솟구치는 분수는 빗줄기였다.
부석사 입구에서 본 터질듯한 그 세찬 물줄기도 분명 빗줄기였다.

엉거주춤....
나는 그렇게 구부리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 봤다.
바닥엔 아무것도 없지만 자꾸만 후벼파야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아니, 어쩌면 내 가슴속을 후벼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빗사이로 뿌옇게 보이는건 시커먼 어둠 뿐이었다.
하늘은 이미 어둠과 천둥이 다 막아 버렸고 언뜻 언뜻 비치는 불빛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갑자기 무섭다는 공포감이 전신을 싸 안는다.
오들도틀한 소름이 살갗에 퍼지면서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울음도 이미 목구멍 밑으로 쳐져 내려갔고
꺽꺽 거리는 해울음만 어둠과 적막을 갈라 놓는다.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에도 귀 열지 않았고
하늘을 가로 지르는 번개에도 눈 감지 않았는데
미세한 바람소리,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에도 목놓아 울고 싶어지는 날이다.

 오랜세월,
기다림없이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들이
어느날 다가온 한줄기 그림자에 난 온몸을 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