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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BY dasu618 2005-01-17

 진서는 리모콘을 들고 채널을 위쪽으로 바꾸었다. 벌레같이 생긴 것들이 꼬물대며 전화기 버튼을 누르라고 난리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진서는 다시 채널을 아래쪽으로 바꾸었다. 진서가 기다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아직도 광고만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하네!”
 진서는 리모콘을 낚아채듯 잡아 들고 채널 단추를 계속해서 눌러댔다. 화면은 꾹꾹꾹 일정한 속력을 내며 변신쇼를 펼쳐댔다.
  “진서야, 엄마랑 잠깐 나갔다 오자.”
 보다 못한 엄마가 진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서는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
  “시장!”
  “싫어. 덥단 말야.”
 진서는 날씨 탓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로봇전사 X맨이 시작할 시간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가고 싶지 않다.
  “그럼 리모콘이라도 가만히 두든지. 정신 없잖아.”
  “엄만 보지도 않으면서......”
  “너어?”
 엄마의 눈꼬리가 홱하고 올라갔다. 진서는 입을 동그랗게 말며 앞으로 쭉 내밀었다. 살짝 잘못했구나 싶어질 때 진서가 짓는 표정이다.
  “알았어. 근데 시장은 진짜로 안가.”
  “정말? 너 혼자 있으면 귀신이 와서~~”
  “치! 그 딴 게 어딨어. 엄마는 내가 어린 앤 줄 아나!”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진서를 엄마는 늘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진서는 그게 마땅치 않았다.
 “알았어. 그럼 얼른 갔다 올게.”
 잔소리대장 엄마가 집을 나섰다. 이제 커다란 집과 로봇전사가 살고 있는 텔레비전은 몽땅 진서 차지가 됐다.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진서는 보란 듯이 리모콘의 채널 단추를 눌러댔다.
 톡톡톡톡......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텔레비전 화면이 모습을 바꾸었다.
 철컥! 디지털 시계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로봇전사 X맨이 할 시간이 되었다. 진서는 리모콘을 두 손으로 잡고 레이저 광선이라도 쏘는 양 텔레비전을 향해 채널 단추를 눌렀다.
 탁탁탁탁..... 만화영화채널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던 텔레비전 화면이 슝- 소리와 함께 거북이 머리 감추듯 사라졌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던 텔레비전에 갑자기 까만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어? 왜 이러지?”
 진서가 리모콘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텔레비전 윗부분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텅! 진서는 왼손으로 따끈거리는 오른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해있었다. 텔레비전은 반응이 없었다.
  “정전인가?”
 진서는 거실의 전등 스위치를 올려보았다. 불빛이 뜨거운 오후 햇살에 주눅이라도 든 듯 노곤하게 쏟아졌다. 어쨌거나 정전은 아니었다.
 진서는 디지털 시계를 쳐다보았다. 04 : 01 이라는 숫자가 깜박거렸다. 로봇전사가 시작하고도 1분이 지났을 시간이었다.
 갑자기 초조해지고 짜증이 솟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시간인데 지금 까먹은 1분이 아쉽기만 하였다. 다시 한 번 손바닥을 치켜 올렸다. 이를 악물고 탕! 탕! 탕! 텔레비전 윗부분을 내리쳤다. 마지막 타앙- 소리와 함께 지이익- 전기음이 들렸다.
 진서는 부지런히 텔레비전 화면을 살피었다. 분명히 소리가 들렸는데 텔레비전 화면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이, 신경질 나!”
 이번에는 양쪽 손바닥을 쫙 펴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탕! 탕! 타-앙!
 직, 지이이익-
 전기음이 일정하게 이어졌다.
  “됐다!”
 진서는 빨개진 양쪽 손바닥을 호호 불며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섰다.
 지이익- 직!
 전기음은 몸부림을 치듯 텔레비전을 휘감았다. 휘청! 진서가 중심을 잃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요란한 전기음과 함께 휘이익- 진서가 사라졌다.

 사방은 조용했다. 바람 소리 한 점 들려오지 않았다. 답답한 느낌에 눈을 떴다.
 진서는 광택 없는 은빛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로 크고 날카로운 가시 그물막이 진서의 몸을 친친 감고 있었다. 진서는 그것이 악당 크로우의 무기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왜 악당 크로우의 무기가 자신을 감고 있는 지 그 사실만큼은 알 수 없었다.
  “이제 포기해라!”
 악당 크로우의 음성이었다. 진서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에 로봇전사 X맨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진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바로 뒤에 악당 크로우가 있었고, 진서는 크로우에게 잡혀있었다.
  “이게 어떻게......”
 진서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워. 지금 넌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구!”
 악당 크로우가 거칠게 그물막을 조여왔다.
  “아아악!”
  진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고통스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혼란스러웠다. 이곳은 어디일까...... 로봇전사 X맨과 악당 크로우가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분명 텔레비전 안이다. 하지만, 진서가 어떻게 텔레비전 안으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로봇전사, 힘내!”
 진서 또래의 아이들 목소리가 먼 곳에서 웅웅거렸다. 진서는 사방을 두릿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야트막히 내려앉아 있었다. 어쩌면 하늘이 아닐 지도 몰랐다. 푸르지 않았다. 잿빛. 아무렇게나 칠해놓은 듯한 빛깔이었다.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은 부서진 건물과 자동차로 아수라장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로봇전사 X맨의 공간, 그 모습이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선명할 뿐이었다.  
 소리가 울려 퍼진 곳에는 까만 막이 있었다. 온통 까맣기만 했다. 까만 막 뒤로 반짝이는 것들이 무수히 보였다. 진서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까만 막을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그것은 분명 눈동자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눈동자들이 나름대로 빛을 반짝이며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으로 들어온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진서의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해진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듯 했다. 로봇전사와 악당 크로우는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하느라 진서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챙- 챙- 치고 받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왔다. 바로 눈 앞에서 로봇전사와 악당 크로우가 싸우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쾅쾅 두드리며 애타게 보고 싶어했던 장면이 아닌가. 여기가 어디 인지, 어떻게 해서 들어오게 되었는 지 따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진서는 지금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로봇전사를 마음껏 응원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서의 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로봇전사와 악당 크로우의 싸움이 절정에 이른 듯 싶었다. 로봇전사 최대의 무기 오버더빔이 악당 크로우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우와!”
 또 다시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웅웅거렸다. 진서의 마음 속에도 함성이 퍼졌다.
 때 마침 로봇전사가 끝날 때 흐르는 노래소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악당 크로우는 정신이 없는 듯 이마를 감싸안고 비틀거렸다. 로봇전사 X맨은 진서에게로 다가왔다. 진서의 몸을 친친 감고 있던 악당 크로우의 그물막을 막 벗겨내는 순간. 붉은 광선과 함께 까만 막이 밀려들었다.
  “빨리, 빨리~”
 황금빛으로 빛나던 로봇전사의 옷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크로우의 검은 망토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순간, 검은 그림자가 되었던 그들의 몸에 알록달록한 풍선이 마구 붙었다.
  “넌 뭐하고 있어? 빨리 준비해!”
 로봇전사였던 검은 그림자가 진서를 재촉했다. 갑작스럽게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진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서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기운은 사라져버렸다. 답답하게 가슴을 조여오던 그물막도 없어졌다. 대신, 커다란 풍선이 진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붉은 광선이 새어들어왔다. 까만 막 뒤로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주위에는 알록달록한 풍선이 가득 했다. 로봇전사와 크로우였던 그림자들은 풍선을 터뜨리는 벌레가 되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진서는 풍선인형이었다. 두 마리의 벌레가 꽁지를 흔들며 풍선을 터뜨리는 동안 진서는 커다란 입으로 끊임없이 풍선을 뿜어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까만 막 뒤로 수많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이, 시시해!”
 아이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광선과 함께 까만 막이 밀려왔다. 진서는 깍깍 대는 까마귀가 되어 있었고, 로봇전사였고 풍선 터뜨리는 벌레였던 그림자는 남루한 한복을 걸친 아저씨가 되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벌레들과 함께 춤을 출 때 보다 더 빨리 붉은 광선이 새어 들었다.
 문제는 붉은 광선이었다. 그것이 한 번씩 새어 들어올 때마다 진서는 음료수 병을 들고 춤을 추는 팬더곰이 되었다가 하늘을 나는 별똥별이 되기도 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진서는 수없이 옷을 바꿔 입으며 매번 다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물에 맞게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했다.

  “이제 그만! 제발 그만 좀 해!”
 진서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진서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진서의 목소리와 함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까만 막 뒤에서 무수히 반짝이던 눈동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또 다시 갑작스럽게 멈춰버렸다. 덜컥 겁이 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요란한 삐에로 분장을 한 채 작은 북을 두드리고 있던 그림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흐유, 이제야 좀 살겠네!”
  “얘! 너도 좀 쉬지. 왜 그러고 있어?”
 그림자 하나가 진서에게 말을 건넸다.
  “쉬라고?”
 진서가 되물었다.
  “그래. 이제 그 옷을 벗으라고.”
 진서는 고개를 숙여 옷차림새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입고 있었던 바로 그 차림이었다.
  “그 옷은 언제 입는 거지? 처음 보네.”
  “맞아. 우리들 옷 중에 저런 것도 있었나?”
 그림자들이 떠들어댔다.
  “이건 원래 내 옷이야.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이라고.”
  “원래 입고 있었던 옷? 푸하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니?”
 말도 안된다는 투였다.
  “우리한테 원래 입고 있는 옷이라는 건 없어.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입을 수 있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행동만 할 수 있지. 우리한테 원래 갖고 있는 건 하나도 없어.”
  “흐유.. 사람들이 변덕을 조금씩만 부려주면 참 좋을텐데... 쉴 새 없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건 정말 힘들어!”
  “맞아. 가끔씩은 내가 제대로 갈아입었는 지 쳐다볼 겨를도 없다니까.”
 그림자들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한숨까지 내쉬었다.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이이익-
 또 다시 전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쉬던 그림자들이 서둘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삐에로 옷부터 시작했다. 까만 막이 다시 드러나고 까만 막 뒤로 수 많은 눈동자들이 다시금 빛을 냈다. 진서는 까만 막 뒤에서 리모콘을 들고 쉴 새 없이 채널을 바꿔대는 꼬마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