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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소들아~~~~~ 정말 미안해


BY 운주산야풍 2005-04-09

*농민신문사 주체 농장수기공모에서 우수상 입상했던 글 입니다. 나를 발가벗기는 느낌 이지만 결코 숨길 이유도 없기에 공개 합니다.지금의 내 삶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소들아 ~~~ 정말 미안해


1982년4월18일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로 시집을 왔다.

중매로 만나서 부모님의 뜻대로 왔는데 와서 보니까 손바닥만한 농사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했다.(남편에게 약간의 돈이 있긴 했다. 중동근로자로 일했었단다.)

마침 서울 사시는 셋째시숙님께서 시골에서 젖소를 키워 보시겠다고 혼자 내려 오셨다.

젖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로...

4마리의 중송아지를 구입했다.

두 형제는 밥숟가락 만 놓으면 지게를 지고 풀을 하러 다녔다.

그러다가 경운기를 구입해서 조금 더 멀리까지 가서 풀을 많이 해다 날랐다.

부모님과 나는 해온 풀을 안팎으로 늘어 말려서 저장을 했다.

가을에는 볏짚을 말리고 묶어서 날라 오고 쌓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는 다 수 작업을 했다.)

도시에서 살던 나는 모든 게 어설프고 힘에 겨웠다.

다행히 4마리의 소는 잘 자라서 새끼도 잘 낳았고 우유라는 것도 짰다.

다음해엔 5마리의 소를 더 구입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새로 구입해온 소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잘 모셨다.

수정을 시킨 후에는 운동도 시키지 않고 잘만 먹이고...

그 소들마저 우유를 짜면 좀 나을 거라는 희망으로 꿈에 부풀었는데,

결과는 소들이 새끼를 못 낳았다.

태아가 너무 살이 찌고 커서 낳을 수가 없었다.

이웃사람까지 와서 잡아당겨도 나오지 않았다.

무식했던 우리는 경운기에 줄을 매고 끌어 당겼지만 나오지 않았다.

결국엔 수의사가 와서 태아를 4등분해서 꺼냈고, 어미소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할 수없이 헐값에 팔았다.

3마리의 소를 똑같이 실패하고 나니까 젖소라면 정나미가 떨어졌다.

소들이 새끼 낳으면 송아지 팔고 유대 나오면 모아서 갚으려고, 미리 돈을 빌려서 초지조성 할 땅을 구입했었는데, 소는 소대로 없어지고 빚은 빚대로 남았고 비용발생만 많았다.

계획대로 안 되는게 인생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하는 수없이 친정가서 조금의 돈을 빌리고 결혼폐물을 다 팔아서 읍내에 작은 점포를 하나 얻었다.

양장 기술이 있던 나로서는 바느질을 해서라도 만회를 하고 싶었다.

집안일하면서 바느질 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바느질거리는 많았고, 어려운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는 사이에 형님네는 축사를 다른 곳에 짓고 이사를 나갔고, 우리는 따로 한우10마리를 구입해서 한우번식을 시작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어머니께서 쓰러지셨고 양장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1990년)부터 우리는 한우번식을 본격적으로 했다.

내가 소 관리에 참여했고 사료며 송아지구입도 내의견대로 했다.

좀 비싸더라도 등록우도 구입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환경문제도 있고 할 수없이 초지조성 해놓은 산에 축사를 짓고 소들을 먼저 이사 시켰고, 1년 후에는 집을 지어 우리도 산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까지 살고 있다.

2년 후에는 새로 축사도 짓고(축산자금융자로) 꿈을 다시 한번 부풀렸다.

온통 소만 바라보고 살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성공이 우리 가까이 오는 것 같았는데, 역시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다.

IMF 라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에게 더 이상 축산을 할 수없게 깊은 파도를 일렁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하락의 늪으로 곤두박질치는 소 값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사료 값은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축산을 그만두자니 축사에 투자한비용과 각종 농기계 값을 갚을 길이 없고, 당장 생활비와 두 아이들 학비 충당하기도 어렵고 앞을 볼 수 없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홀스타인(젖소) 숫 송아지 값이 한우보다 먼저 하락하기에 설마 지금보다 더 하락하지는 않겠지 싶어 대출을 받아서 20마리를 입식했다.

겨우내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길렀더니 봄이 되니까 소 값은 더욱더 하락해서 사료 값이 또 빚으로 남을 지경이었다.

홀스타인의 사료섭취량은 한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았다.

도저히 더 이상 사료 값을 감당할 수 가없어 기르다 말고 홀스타인은 다 팔았는데 고생만 죽도록 하고 빚만 남았으니 죽을 맛이었다.

내가 저지런 일이라 남편의 불만이 많았고 남편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갈등도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료 값과 여러 가지 비용발생과 생활비 등을 다 빚을 내서 했으니 이자는 눈덩이처럼 커져 만가고 이율은 자꾸 오르고,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남편은 소 다 팔아서 사료 값이나 갚고 직장 다녀서 나머지는 갚아가자고 했다.

그러면 축사에 투자한 비용과 농기계는 영영 쓰레기가 될 텐데...

나는 도저히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송아지생산비를 최대한 낮추고 사료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남편을 설득했고, 생활비라도 벌어 볼려고 내가 직장을 구해서 다녔다.

‘궁하면 통 한다’고 했던가.

내가 들어간 회사에서 나오는 식품부산물을 싸게 구입할 수가 있었다.

최소한의 사료와 섞어서 급여하면서 풀을 많이 이용했고, 겨우겨우 사료비 걱정은 덜 수가 있었는데, 수정비가 문제였다.

축협수정사를 많이 이용했는데 자리이동이 잦아서 직원이 바뀔 때마다 서툴고 믿고 맡기기도 그렇고 개인수정사는 수정비가 좀 비싸서 몇 번 실수하면 송아지 값이 수정비로 다 날아갈 판이었다.(송아지 값이20-30만원 이었으니까)

수정을 배우려고 해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기관도 잘 모르고, 핑계 김에 학교에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늘 꿈으로만 간직 하고 있던 공부를 이 기회에 해볼 작정이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학과는 아닐지라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굳은 결심을 하고 직장도 그만두고 농사일 열심히 하면서(수박농사도 지어봤다) 틈틈이 공부도 하고 농한기에는 학원도 다니고 최선을 다했다.

별로 달라진 여건도 아닌데 생각을 바꿨더니 꿈과 희망으로 부풀은 즐거운 나날이 되었다.

‘인생은 새옹지마’

어이없게도 집에서 사고가 나서 내 다리가 골절이 되었고 또 한번의 좌절을 겪어야했다.

지루한 투병생활은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어렵게 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영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만 했다.

이 기회에 아예 대학의 꿈을 앞당기리라 야무지게 맘 먹었다.

영농기반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수능을 치러봄으로 수능 세대인 우리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과 세대 차이를 줄일 수 있는 창구를 만들고 싶었다.

열심히 하는 척 해도 성적은 왜 그리도 야속하게 안나오는지, 아이들한테 민망할 때가 많았다.

결국은 가고 싶었던 학교는 못 갔지만, 대학이라는 꿈에도 그리던 나의 소원을 이뤘다.(천안 연암대학)

내가 직접 축산을 하면서 겪었던 일, 궁금했던 일, 사료가 될 수 있는 부 산물,사료포 관리...

학교는(전문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해줬다.

사료학을 배우기 전에는 단순히 곡물류나 풀 종류만 사료로 사용하는 것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배우고 나니깐 주위의 모든 것이 사료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TMR배합기 겸 발효기를 구입해서 농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깨를 털고난 깻대 옥수수만 따고 버린 옥수수대 콩대 콩깍지 목질화 된 산야초...)것들을 걷어 와서 식품부산물과 기계에 넣고 돌리면 아주 부드럽고 맛있는 사료가 된다.

배합기에 돌리지 않고 그냥 급여하면 부드러운 것만 먹고 목질화된 것은 안 먹어서 허실이 많은데, 배합기 구입한 게 얼마나 잘 한일인지...

또 우리 사료포 에서 옥수수를 재배해서 함께 사용한다.

미생물제재를 넣고 발효시켜서 사용하면 더욱더 좋다.

완전 소화되기 때문에 사료효율도 높고 축사에서 축분냄새가 안 난다.

(축분냄새는 덜 소화된 사료가 부패되면서 나는거니까.)

또한 고기의 육질과 맛이 좋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침 식육처리강의가 있어 금상첨화였다.(처음 있었던 강의).

고기에 대해서는 소고기,돼지고기 밖에 몰랐던(부위를 전혀 몰랐었다) 내가 식육처리기능사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고기에 관한한 전문가가 됐다.

학교생활은 조금은 어색하고 멋쩍을 때도 많았지만, 재미도 있었고 건강한정신과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농축산하는 주부가 하루를 학교에서 보내고 집에 오면 밀린 집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잠을 설치면서 공부를 해도 따라가기가 쉽지가 않았다.

직장은 갔다 오면 그걸로 끝나지만 학교는 그게 아니었다.

그런 것쯤은 헤쳐 나갈 수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한파는 우리를 몹시 힘들게 했다.

소 값이 곤두박질치니까 남들은 소를 팔아치우는데 우리는 청개구리처럼 소를 늘려만 갔다.

생산된 송아지들을 팔지도 않고 비육을 시켰다, 혹시 무슨 길이 보일까하고... 날이 갈수록 불어난 건 사료 값에 늘어난 빚뿐이고, 소를 다 팔아도 사료비를 못 건질 판국이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그때는 큰소(500kg)기준으로 120~130만원 이었다.

억울해서 중간 상인들한테 넘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너지면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가 가니까(축산자금,사료비등은 서로 맞보증 서니까) 절대로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오만가지 생각 끝에 내가 유통까지 하면 좀 나을까싶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정육점을 해 보려는데 창업자금이 없었다.

큰형님네서 마이너스통장 빌려 달라고 해서 급한 건 그걸로 쓰고 나머지는 외상으로 해서 가게부터 꾸미고 개업을 했다.

모두들 말렸다. 남편 까지도... “경기가 바닥인데 어쩔려고...”

그래도 난 물러설 수 가 없었다.

여자이기 전에 두 아이 엄마인데, 아이들 학비가 없어 학교를 그만 두게 할 지경이니 뭔들 못하겠나 싶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를 모토로 소비자와의 직접 만남이었다.

두렵고 가슴 떨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식육처리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해서 정성껏 정말 최선을 다해 소비자와 만났다.

큰 이익이 남는 건 아니었지만 중간상인들한테 넘기는 것보다는 많이 나았고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

소비자의 입맛은 정확했다.

나를 믿어주고 정성껏 키운 우리소고기를 알아줬다.

매일매일 현금이 도니까 급한 돈부터 갚아갔다.

그러면서 번식은 계속하고, 다행히 소 값이 회복이 되서 그럭저럭 급한 불은 껐다.

그런데,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일 이 생겼다.

처음에는 운송비를 주고 소를 운반시켰는데 운송비가 만만치 않아서 차량을 구입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남편이 혼자서 소를 차에 태울 수가 없어서 내가 도와줘야 했다.

운송비주고 시킬 때는 나는 소한테 미안해서 안 내다봤는데, 이제는 내가 소한테 나가라고 부추기니 가슴이 미어진다.

나가지 않겠다고 딱 버티고 있는 녀석을 달래고 달래서 겨우 차에 태우면서 어느새 소 눈과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정말정말 소한테 미안하고 내가 몹쓸 짓 하고 있구나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엄마뱃속에서 1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고 태어났어도 2~3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살면서 정이들대로 들었고, 표정이나 눈빛 만 봐도 무엇을 요구하는지 통하는데, 이제는 내가 살아야겠다고 가기 싫다고 애원하는 녀석들을 달래서 도축장으로 보내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싶다.

나는 더 이상 소엄마도 아니고 소한테는 마귀할멈이다.

소들아! 너희들 볼 면목이 없구나 정말 미안해.

너희들이 잘 먹고 있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너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우리가 살기위한 수단이니까, 더더욱 미안해.

그렇게 가지 안겠다고 딱 버티던 발이 몇 시간 뒤에는 우족이 되어 들어오고,

애원하던 그 두 눈은 딱 감은채로 소머리라고 부리어지는구나.

난 너희들을 붙들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많이도 울었단다.

너희들을 자식과 같은 애정으로 보살피고 함께 했는데 내 삶의 방편으로 이렇게 몹쓸 짓을 하는구나.

자꾸 삶의 회의가 느껴지는구나.

IMF가 참으로 무섭구나.

너희와 나의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어 주는구나.

너희들이 누런 털옷 벗어던지고 선홍빛 고운빛깔의 고기로 탄생해서 들어오면, 난 또 눈물보가 터져 찔찔거리고 우는데, 사람들이 위로 한답시고 이런 말을 하더구나.

너희가 사람한테 ‘보시’ 한다고도 하고 ‘하느님이 사람이 먹고 살아갈 식량으로 주셨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는구나.

어떤 말로도 너희들한테 용서를 받을 수 없겠지만, 용서 해 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새끼사랑 하는 것 보면, 사람보다 못 할 것도 없던데, 왜 사람이 너희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사랑하는 나의 소들아!

다시는 소로 태어나지 말거라.

어차피 이렇게 된 운명!

새로운 변신을 했으니 넘치는 에너지원이 되어 사회정의를 위해 쓰여 다오.

나도 너희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살께.

내가 너희들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구나.

한없이 고맙고 미안해. 나의 소들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