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우리학교 (천안연암대 에서 공모한 당선작 입니다) 그때 졸업반 이였지요
“텅~빈 가슴이 시려요” 라는 노랫말이 나도 모르게 자주 흥얼거려진다. 뭔가 허전함이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나 보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이 늙은 학생(?) 으로서의 보람된 시간을 마감시키려 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쓸쓸하고 허전하고 텅 빈 가슴으로 다가오고 있다.
매일매일 시간에 쫒겨 허둥대고 동동거리면서 어느덧 2년이 지나고 있다. 오전 강의시간에는 지각 안한 날이 기억에도 없다. 교수님과 우리 반 친구들(?) 에게 너무너무 미안하고 염체도 없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뻔뻔스럽게도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학교에 다닐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왜 그리도 해야 할 일거리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밤새 안녕”이라고 했던가? 이 말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 인사말인지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에겐 “밤새 안녕”만 날마다 됐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집으로 바로 못 가고 가게에(소값 폭락으로 부도직전에 차린 나의전부인 가게) 가서 아줌마 퇴근시키고 내가 가게를 보면서 기계 닦고 뒷정리하고 늦게 집에 올라가면 주부로서 해야 할 일거리가 새벽녁이 될 때까지 해야 끝이 난다.
그렇게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또다시 아침을 맞이하면 소들과 함께 또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자신 있게 말 한다 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공학을 하고 있다고......
어젯밤에도 평화롭던 농장이 날이 밝아보면 밤새 무슨 일이 생기는 날이 많다. 어린 송아지가 아프다던가 운동장에 있는 소들은 서로 싸우다가 바위틈에 끼어서 넘어진 놈도 생기고 발정이나 분만증세도 아침에 발견하게 된다.
아침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아침하다 말고 몇 번 들락거리면 어느새 아이들 학교 데려다 줄 시간이다. 나야 어차피 지각이지만 아이들만은 지각 안 시키려고 데려다 주고 온다.(우리는 산 속에서 소와 함께 살기 때문에 교통편이 없어 매일 데려다 주고 데려 와야 한다)
또 어떤 날은 정육점에서 쓸 소를 아침에 실어 보내야 하는데 안가겠다고 눈만 껌벅이면서 버티고 서 있을 때는 속이 상하고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는지...? 소한테 미안하고 시간은 자꾸 지나고 학교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침에는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루가 시작된다. (물론 안 그런 날도 많지만...)
학교 가기 전에 정육점에 들러서 이것저것 체크해 보고 주문 온 것 배달해 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지각은 당연한 것처럼 내게 다가온다. 학교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가계경제도 무시할 수가 없다. 남들은 말 한다. "가게는 남한테 맡겨 놓고 무슨 학교냐고... "
나는 남들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 거니까.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학교엘 다닐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나 스스로도 놀랍다.
내 마음의 울타리였던 학교(학교 안에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은 잠시 뒤로하고 나도 학생으로서 보호받는 느낌과 내 삶의 무거운짐을 다 벗어 버린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다) 이제는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하다니...어느새 졸업이라니...?
수능 준비 하면서 무척 힘들었지만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텼고 주위의 많은 여건들이(농축산 하는 시골 아낙이 대학엘 간다니까 정신 나갔다고들 하고 그 나이에 배워서 뭘 한다고......) 학교에 등록하기까지 많은 망설임과 갈등의 연속이었는데, 배우고 싶다는 내 마음을 남편이 이해해 주고 믿어 줬기에 큰 힘이 됐다. 남편한테 정말 고맙다. 다른 학생들은 쉽게 학교에 다닐지 모르지만 내 나이에 이런 여건에서 학교 다닌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지금 와서 생각 해보면 나의 탁월한 선택과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어려운 시기에 하필이면 다리를 다쳐서 아무일도 할 수가 없었고,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날이 늘어 갈 때쯤 이 기회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아예 학원에 등록했었다.
공부에 미련이 있어 농한기에 조금씩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다리 다친 것이 오히려 빨리 대학까지 오게 했다. 운전을 할 수도 없어서 남편이 천안에 학원까지 데려다 주고 강의실까지 업어다 주고...
어느정도 움직임이 가능 해 졌을 때 거금(?)을 들여서 차를 개조 해줘서 그 나마도 자유롭게 이동을 할 수가 있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목발은 짚고 다녔을망정 운전은 혼자 할 수 있었다.)
남편의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어도 수능점수가 왜 생각만큼 안 나오는지 무척이나 미안했다. 어렵게 시작한 공부니까 기왕이면 4년제 학교에 가라고 부추기는데 점수가 되어야지... 어쩔 수없이 연암으로 가긴 했는데 그것이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지금은 누구한테도 자신 있게 말한다. 축산분야에서 우리 학교만큼 알차게 배우는 곳이 없을 거라고...
나는 그날그날 배운 것을 농장에 적용시켜 보고 관찰해 보고 한다. 다른 학생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겐 한 과목 한 과목 모두가 실전이고 가슴에 와 닿는다. 무한의 재산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느낌이다.
학교 다닌다는 것이 나에겐 기쁨 그 자체이다. 지금 만지고 있는 컴퓨터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인줄 알았는데 학교에 와서 부터는 어쩔 수 없이 만지게 됐다. 처음에는 그 과목 선택한 걸 많이 후회했고 교수님과 학생들 보기에 어찌나 민망하던지 아줌마가 이게 무슨 주책인가 싶어서 중간에 포기하려고 생각했는데, 도중에는 포기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긴 했지만 여러 학생들한테 도와달라고 보채고 신세도 많이 졌다. 나의 뻔뻔스런 용기가 다시 한번 발휘되는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나 혼자 문서작성을 할 수 있게 됐고 레포터도 작성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다는데 놀랍고 신기하다. (내가 컴맹이었을 때는 레포터 작성 할 때마다 아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해줬다. 그 동안 짜증한번 안 부리고 도와주고 가르쳐준 아들한테도 너무너무 고맙다. 지금은 속도는 느리지만 혼자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이 기분 다른 사람들은 알까?)
레포트를 제때에 못하고 성적이 나빠도 그래도 나는 보람되고 행복하다. 운전면허증 밖에 없던 내게 축산기사와 식육처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해줬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또 다른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어려운 일이 생기고 지치고 힘이 들어서 쉬고 싶은 날도 사실은 많다. 그럴 때마다 학교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또 다시 일어선다 지각을 해도 좋다.(이미 강의에 늦은 시간이지만)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겨들고(엉뚱한 책을 챙긴 적도 많다) 운전대만 잡으면 마음은 벌써 강의실에 가 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서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옥...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듯 나도 우리 반 아이들의 얼굴과 교수님의 강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 시간을 순간처럼 달려간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과속으로 걸린적이 여러 번 있고 급기야 단속 카메라에 찍혀서 위반 사실 통지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고 쓴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학교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며 내 삶의 희망이며 재충전이며 힘든 일상에서의 탈출구이다.
학교에서 얻은 정보, 지식, 상식, 모든 것이 나에겐 도움이 된다. 사료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 학교에서 기자재 박람회 견학을 갔었다. 나는 꼭 보고 싶은 기계가 있어 그것만 신경쓰고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찾았다.
월간지 광고에서만 보고 여러 회사에 전화로만 상담하곤 했었는데 그곳에서 직접보고 설명을 들었다. 전화로 상담해본 회사의 기계들은 TMR과 발효기가 따로 돼있는데 이 기계는 그것이 한꺼번에 가능하다고 했다. 믿기가 좀 어렵긴 했지만 실물을 봤으니 믿어야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구입하고 싶은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현찰 판매만 한다니 뜬구름 잡는 기분이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믿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인천까지 가서 제작 과정을 보고 또 설명을 들었다. 그제서야 남편은 수긍을 했다. 우리집에 맞게 기계를 개조해서 가격을 좀 낮추긴 했지만 그래도 2000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기엔 우리 여건으로는 역부족이었다.
IMF 때문에 밀린 사료값이 눈 덩이처럼 커져 있어 사료값 절약 방안으로 이 기계를 필요로 하는데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는 이율도 높아서 대출해서 기계를 구입한다면 이자와 기계운영비와 노동력...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는데, 그래도 아쉽고 미련이 남아서 군청 축산계에 도움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 도와 줄 방법이 있다면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송아지 생산비 낮출 수 있는 TMR기계를 구입 할 수있게 도와달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하는 답변이 자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냐고?(시골 사람이 전문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는 식의 말투여서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래서 내 대답이) 나 지금 연암축산대 에 다니고 있고 사료학도 배우고 초지, 조사료 다 배우고 있어서 알아들을 만 하니까 무슨 말인지 해 보라고 했더니 자기도 연암 출신이라고 했다. 나도 연암 출신의 선배가 군청에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다고 말문을 텄고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무척 친해졌고 선배로서 후배에게 잘해줬다.
학번은 그쪽이 10년 빠르고 나이는 내가 열 살이 많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좋겠느냐고 하길래 당연히 그쪽이 선배님이고 나는 후배지요 라고 해서 한 바탕 웃고... 일이 잘 진행되어서 그렇게 가지고싶던 TMR발효기를 구입했고, 지금은 그 선배와 10년지기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축산에 관한 행정적인 업무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이것이 다 학교라는 인연으로 얻은 보이지 않는 나의 재산이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기계가 우리 농장의 어려운 경영을 조금씩 회복시켜 주고 있고 그때 잘 버틴 덕택에 소값이 회복되어 금상첨화다.
그런데 문제는 원료 수거하러 다니랴 사료 만들랴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든다. 나는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남편만 힘들게 해서 미안한 마음은 커져만 간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는 소 사료가 단순히 곡류와 초식만 되는줄 알았는데 배우고 보니 주위의 많은 것이 사료가 된다는 걸 알았다.
물론 올 한해는 배운 것을 실천하기보다는 관리소홀로(시간상) 송아지 폐사가 많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실패는 없을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학교는 나에게 날개를 달아 줬다
내 삶에 활력의 날개를 달아줬고
자신감의 날개를 달아줬고
나태하지 않고 부지런한 날개를 달아 줬고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의 날개를 달아 줬고
내 아이들과 세대 차이가 없는 신세대의 날개를 달아 줬고
희망과 기쁨의 날개를 달아 줬다.
나의 늦깎이 배움의 터에서 묘한 인연으로 만난 귀한 친구들(?)을 질긴 인연의 끈으로 꽁꽁 묶어서 내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조카 같고 아들 같은 친구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그들의 생각과 삶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기에 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함께 얘기할 수 있고 벽이 생기지 않아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나의 꿈은 내 삶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날 쯤에 귀한 나의 친구들은 삶의 한 가운데서 활기찬 삶을 꾸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옛친구들이 그리워 그들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고 싶다.
시간에 옥메이지도 않고 동동거리지도 않으면서 이친구 저친구 찾아다니며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고 싶다.
삶에 바쁜 내 친구들의 이음자리가 되고 싶다.
나의 귀한 친구들아~~~~~~~~ 문전박대는 안 하겠지?...(나만 짝사랑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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