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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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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쌀뜨물


BY 캐슬 2006-06-30

 

 도깨비 쌀뜨물


                                        정 은 영


 여자의 몸에 가시가 돋아나고 있다. 처음엔 소름처럼 올라오던 피부가 조금씩  단단해지더니 이윽고 날카로운 가시가 된다. 피부가 날카로워져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가시는 하나 둘 늘어 마침내 온몸이 가시로 뒤덮여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관찰한다.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는 걸 느끼면서 피부는 예민하게 경직되어 마침내 가시가 된다. 남자의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어 여자는 남자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되자 가시는 천천히 스러져 부드러운 피부로 돌아간다.

 사람의 첫인상은 서로 마주해 오 초가 지나면 결정지어진다고하니 남자와 여자는 이미 나란히 한지 30분이 넘었으니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마음속에 은밀히 담겼다.

 남자는 갑자기 대단한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여자를 건너다보며 '초록이 좋습니다.' 라며 말을 건넸다. 여자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예’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다.

 여자를 늦은 오월의 강가로 간다. 여자는 바위에 부딪치는 강물이 되었다가, 이름 모르는 들꽃 위에 바람으로 사뿐히 앉았다. 여자는 모래톱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굽이치던 물방울이 손등을 툭툭 건드리면 슬그머니 일어났다. 강물에 부딪치며 휩쓸리다보니 가시는 어느새 매끈하게 없어졌다. 남자의 눈이 여자의 어깨와 목덜미를 슬며시 건너다본다. 여자의 몸에 모든 솜털이 일어서더니 가시가 다시 돋아나려한다.

 감색계열의 옷을 입어 신뢰감이 느껴지는 이 남자는 이야기를 할 때면 두 손으로   제스처를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대화 중 상대방의 몸짓을 따라하거나 긍정과 칭찬을 많이 해주어 금방 친해질 수도 있어 보여 처음 만났을 때 남자가 본능적인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어서 얼마나 다행인가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얼마나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여자에게는 다 보인다.

 버스가 멈춘 곳은 그럴듯하게 적막한 산중의 호젓한 식당이다. 여자가 도깨비 쌀뜨물을 앞에 두고 앉았다. 도깨비 쌀뜨물 몇 사발로 여자의 얼굴이 붉어진다. 갸름한 눈자위에 해실해실 눈웃음이 걸리고 고집스럽게 다물었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몇 순배의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여자의 막혔던 속이 뚫리는 듯 시원하다.

 여자는 떠나버린 남자가 남기고 간 수많은 맹세를 생각한다. 맹세란 지키고 싶을 때만 유효하다. 모든 사랑의 맹세는 진실하지만, 사랑이 떠난 다음까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그 맹세를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사랑할 때만 맹세를 지킨다. 그러므로 맹세란 아무 구속력도 없는 것이다. 맹세가 효력이 있는 것은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위로로 쓰일 때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세상에 고통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여자에게 그 고통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금 그 고통의 시간이 왔을 뿐이다. 머리 위의 구름처럼 시간이란 머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다른 시간이 다시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 고통을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진다. 이런 것을 두고 옛사람들은 세월은 못 고칠 병은 없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 순간 뿐일 것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데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적막의 소리. 침묵의 소리가 보이고 들린다. 돌담 사이로 찔레꽃 이파리가 떨어져 내리고 여자의 시선이 닿은 곳엔 적막뿐이다. 붉은 햇살도 눈꺼플을 내리고, 강물조차도 눈을 감아버린 적막. 산마저 검고 길게 드러누워 버린 적막. 여자의 영혼도 적막이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여자의 눈이 서러워진다.

세상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사랑도 흘러가면 그만이다. 붙잡으려는 순간 흘러가버리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모두 쓸쓸하다.

 여자의 흐린 눈자위에 흐르는 눈물인양 도깨비 쌀뜨물이 뽀얗게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