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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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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걸인의 효행


BY 산골향 2004-03-23

☞ 해질 무렵 바다는 은빛으로 자란 거린다.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봄 바다를 즐기는 여행객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바다 위 점점이 떠있는 고깃배들의 불빛이 차츰 포구를 향해 오고, 부두에는 고기를 받으러 나온 아낙들로 북적거릴때 쯤 그 틈을 헤집고 바삐 부둣가로 다가오는 행색이 남루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배가 들어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다리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하며 너덜거리는 옷차림새에 땟자국이 자르르한 그 모습이 걸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 걸인 같으면 구걸을 했음직도 하건만 오십을 넘겼을 이 걸인은 계속 고깃배가 들어오는 바다만 쳐다보며 혼자 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통통통’ 발동기 소리를 내며 한두 척의 고깃배가 포구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깃배는 점점 많아졌다.  그 중 한 고깃배는 오색 깃발을 휘날리며  손을 높이 흔들어 보이는 어부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만선의 기쁨을 알리는 표시였다.
  그 순간 묵묵히 서있던 그 걸인은 가슴에서 두툼한 종이상자  조각을 꺼내더니 검은 고무줄을 단 그 종이 조각을 목에 걸었다. 그 상자 조각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진을 목에다 건 걸인은 일사불란하게 고기 상자를 받아 내리는 어부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고깃배 앞에 바싹 다가가서 큰절을 올리고는 양팔을 벌리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 "아부지요, 어무니요!! 지금 싱싱한 고기가 가득하오니실컷 잡수시이소. 생전에 잡숫지 못했던  고기이오니 많이많이  잡수소이소."

나는 걸인의 고함에 움찔 놀라면서도 그 행동에 쿡쿡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곧 웃음을 멈춰야했다.   걸인의 말이 격해지며 절규에 가까운 호소로 바뀌니 내 마음도 숙연해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얼마 후, 갑자기 걸인은 말을 바꾸어 외쳐대는 것이었다.
  “아부지요, 어무니요! 지금 잡수신 것 퍼뜩 토해내이소.
이 놈이 잘못했습니더. 오물이 들어오는 줄 모르고 잘못 드렸습니더."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입항한 배들 중에는 섬에서 오물을 실고 온 배가 있는데 부모님께 그 오물   섞인 고기를 잡숫게 했으니 자신은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땅을 치며 우는 것이었다.
 

 ☞ 어찌보면 우스광스런 행동 같지만 나는 걸인의 행동에서 망치로 손끝을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쓰려왔다.  비록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하찮은 걸인일지라도 생전에 부모님께 못해 드린 것이  한이 되었나 보다.

부모님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 앞에서  실컷 잡수시라고 미친 듯이 소리치는 그 걸인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항구를 빠져 나오는 내 눈엔 이슬이 맺혔다.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는 내내 그 걸인의 모습과  어머니의 영삽이 겹쳐왔다.   기역자로 굽으신 한없이 왜소한 몸과 백발,   자식들에게 다 내어준 세월의 흔적만 가냘프게 지고 계신 어머니. 그러고도 뭐든지 더 주지못해 안타까워 하시는 어머니.    

난 더 이상 여행 일정을 채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계신 시골로 발걸음을 돌리며

어느 유명인의 효행론보다 더 감동적인 명언이었던 그 걸인의 행동을

가슴깊이 새겨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채찍으로 삼으리라 다짐한다.